[112호] 당신과 광장이 만날 때

특별기획

by 성균지

-휘말린 겨울, 대학생-시민을 만나다

부편집장 최가경, 편집위원 이예원, 수습편집위원 정태건




광장은 회백색의 일상을 뚫고 순식간에 자라났다. 계엄의 밤이 지나 처음 맞이한 2024년 12월의 토요일, 여의도역의 지하 건물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헤치고 계단을 올랐다. 너무도 낯설었다. 그토록 수많은 이들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다는 직감이란. 그날 여의도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우리는 거대 스크린 앞에 모여 서거나 앉았고, 본회의장을 단체로 빠져나갔던 105인의 국회의원에게 다시 돌아가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표결하라며 목 터져라 외쳤다. 12월 7일 겨울밤의 구호는 이랬다.


“탄핵 소추/빨리 표결”, “돌아와/투표해”


함께 노래를 부르며 국회의사당을 향해 행진하는 물결과 휘날리는 깃발과 춤을 추는 불빛들과 울려 퍼지는 구호와 환호성에 둘러싸여 있다 보면, 마음속 가장 고독하며 냉소적인 구석조차도 어느새 우리를 다시금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광장이 우리 세계 안에 자리를 틀고 자라났다. 스멀스멀 또 서슴없이, 어느 순간에는 생각지도 못한 마찰과 생채기를 내며.

그렇게 ‘다시 만난 세계’, 광장과 그 의미 체계는 터져 나온 개인들의 외침에 쉴 틈 없이 재조직되는 중이다. 광장은 때로 너와 내가 모여 만들어진 ‘우리’의 가시화된 모습이었다가, 어느 때에는 하나의 구호에 겹겹이 목소리를 쌓는 확성기로 기능했다가, 마주친 적 없던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잠시나마 함께 되는 전람회 같은 것이었다가, 각종 커밍아웃과 속풀이와 연대 요청으로 시끌벅적한 게시판이 된다. 광장은 실로 이 모든 것이다. 나아온 개개인의 주체만큼이나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본 특집의 물음은 그 풍경 위에 확대경을 올려 단면을 들여다보는 상상으로부터 비롯한다. 미묘하고 또 섬세하게 서로 다른 표정을 지닌 얼굴들, 그 피부 아래 광장의 잠재성은 생동하는 중이다. 그러니 이제 당신과 광장, 분화하고 굴절하는 만남의 그 순간을 다시 유심히 들여다볼 때다.


1부 1장: 깨어나던 밤

배경은 12월 3일과 4일 사이 약 여섯 시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이다. 시민과 의원, 경찰과 군인이 대치를 이루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도록 위태롭던 검은 밤. 그 낯설고 긴박하던 여의도의 전경 속에 수와 지운이 섞여 있었다. 화요일 오후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열 시가 넘어 귀가한 수는 평소와 같이 유튜브에 접속했다가 대통령의 긴급 담화 생중계를 마주했다. “....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과 함께, 오래도록 무력감에 짓눌려온 책임 의식이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정치적 사안에 직접적으로 말하기를 피했던 자신 역시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무력화에 동조해 온 것이 아닐까. 몸을 일으켰다. ‘가야겠다’ 아닌 “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수를 부추긴 생각 한 줄기였다.

지운은 동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공부 모임 채팅방에 전해진 연락을 타고 실시간 뉴스를 확인했다가, 계엄령이라는 단어에 술이 확 깼다. 처음 맞는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확신은 없었지만 무작정 택시를 잡아 여의도로 향했다. 친구들과 모여 국회를 둘러싼 담장 앞에 도착한 건 밤 11시 27분, 계엄사령관 포고령 제1호가 내려진 이후였다.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 정치활동”의 금지가 공표된 국가에서 명령을 어겼다간 현행범으로 붙잡히거나 “처단”당할 수 있었다. 밀려오는 두려움과 함께, 국회로의 진입을 통제 중인 경찰들의 눈을 피해 담을 훌쩍 넘었다. 몇 명의 시민들과 친구들이 지운을 뒤따라 담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시각 유진은 방에 홀로 있었다. 소식을 접하고 처음 닥친 감정은 공포였다. 함께하는 활동지원사는 이미 퇴근을 마친 밤이었고, 정국은 분초를 다투며 전개되는 중이었다. 당장 이 밤이 지나 아침이 왔을 때 그가 전처럼 활동 지원 서비스를 원활히 누릴 수 있을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공공의 돌봄이 필수적인 그에게 이런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란 현황을 초조하게 지켜보며 기다리는 일밖에는 없었다. “이대로 이 방에서 혼자 죽어갈 수도 있다는 섬뜩함을 느꼈어요.” 중증 장애인인 유진에게 계엄은 당장 내일의 생활을 염려케 하는 현실적 위기였다.

가연도 소식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서울에 일이 있어 방문했다가 날이 저물어 본가가 있는 전주로 막 돌아온 참이었다. 가짜 뉴스가 아닐지 의심했지만 실제 상황이었다. “나는 지방에 있다지만, 이제 서울은 어떻게 되는 거지.” 이담은 집에 가는 길 버스 안에서 쏟아지는 친구들의 채팅 속에 계엄을 인지했다. 집에 도착해서는 ‘운동권 출신’ 아버지와 새벽이 되도록 뉴스를 시청했다. 불안하고 화가 났다. 요동치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친구와 통화하며 넷플릭스 시리즈를 봤다. 시리즈 내 참가자들은 너무도 진짜 같은 사물들 가운데 단 하나의 케이크를 찾아내야 한다. 예상치 못한 케이크의 정체에 즐거워하다가도, 분할 화면 한구석 흘러나오는 붉은색 속보 헤드라인에 불편한 두근거림이 일었다.

화면 너머 국회의사당 앞에는 1공수여단이 결집 중이다. 담을 넘은 지운은 그 광경을 휴대폰으로 촬영하며 계엄군이 몰려든 본청을 향해 걸었다. 한 시민이 “여기가 어디라고 군인이 들어오는가”, 크게 호통을 쳤다. 그때 지운은 방아쇠에 걸쳐진 군인들의 손가락을 보고 말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실감하니 소름이 돋았다. 암만해도 목숨까지 걸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국회의 시민들은 총구를 내리라며 다 함께 소리를 높였다.

는 아수라장 같은 현장 속에서 조금은 어색한 감정을 느꼈다. 12월 4일 새벽 1시 1분,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190인 만장일치로 의결된 후였다. ‘역사적’ 순간이 펼쳐지는 가운데 그의 시야 속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휴대폰 카메라와 셀카봉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 참여하는 최선의 방식은 끝내 “인증샷”일까. 달려 나간 현장의 끝에서 다시금 무력감이 찾아왔다. 적극적인 가능성이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어둠이 흐르고 여전히 새벽, 국회 정문 앞에서는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자유롭게 발언하기 시작한다. 수는 그 모습들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광장이 깨어나고 있었다.


1부 2장: 대학이라는 광장

비상계엄령이 최종 해제된 시점은 새벽 4시 30분. 그로부터 고작 몇 시간 뒤, 모두가 ‘원래대로’ 돌아간 듯한 수요일의 아침이 찾아왔다. 명륜동 대성로의 가파른 등굣길은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했으나, 캠퍼스의 온도는 짐짓 바뀐 채였다. 오후부터 줄지어 붙기 시작한 대자보가 그 증거였다. 흰 바탕의 용지 위에 비상식적 계엄 규탄, 윤석열 퇴진과 엄벌 등 지난밤의 책임을 묻는 검은 문장들이 빽빽했다. 총학생회를 비롯해 단과대나 학과별 학생회 차원에서 내놓은 성명문들 사이, 학내 일원으로서 실명과 학번을 명기해 의견을 표명한 독자적인 대자보들도 적지 않았다. 학생 사회에서 이토록 수많은 발언이 동시에 터져 나온 것은 팬데믹 이후 처음이다. 게시판을 겹겹이 채운 대자보 앞을 지나며 저마다의 계엄과 광장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학생들의 광경 역시 낯설었다. 오프라인의 벽보에 이어 소셜 미디어상에서도 낯선 대화의 장이 펼쳐졌다. 국회의사당에서 돌아온 지운은 온라인 공간을 활용해 두 차례에 걸쳐 대자보를 올렸다. 그중 하나에는 그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의 학과 동기들이 이름을 올렸다. 모두 지운이 단체 채팅방에 올린 대자보 초안을 보고 모인 학우들이다.

이전과 언뜻 같아 보이는 일상 속에서도 대자보의 행렬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들이 목도한 12월 3일의 밤, 저마다 겪어온 민주주의에 관한 믿음이 쓰여있었다. 불법적인 그날의 계엄에 대한 분노 뒤에는 왜 대학생인 우리가 이 사태에 대해 침묵하지 않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에 대한 제각기 다른 이유들이 이어졌다. 쏟아지는 대자보들로 학생 사회에는 또 한 번 광장이 자라났다. 지운이 겪었던 그동안의 학내 공간은 정치적인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중요한 이야기인데 이런 얘기 밖에서 안 하죠, 안 하기로 했잖아요. 동덕여대 학생 시위에 대해 교수님이 하신 말인데 너무 기억에 남았어요. 사실 일상에서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로 거의 사회적 합의가 되어버린 상황이잖아요. (지운)

그리고 계엄 이후 학생 사회를 보며 지운은 연결에 대한 가능성을 실감했다. 지운은 그동안 꿈꿔왔던, 학내의 중요한 사안이나 여러 사회 의제에 대해 언제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학생 사회의 한 장면을 엿본 것 같았다.

첫 번째 탄핵 소추안의 의결이 예정되어 있던 12월 7일, 전국 각지의 대학에서 터져 나오던 열기는 국회 앞에서도 하나의 뭉치를 이루고 타올랐다. 31개 대학에서 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시국 선언문을 발표하고 구호를 외쳤던 ‘윤석열 퇴진 대학생 시국 대회’가 일례다. 이들은 12월 10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대학생 시국 회의 결성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처럼 학생들은 각자의 대학 내에서, 그리고 또 광장에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학생 사회에 막 붙기 시작한 불씨를 더 크게 키웠다. 계엄 이전부터 터져 나왔던 변화의 바람은 탁 트인 광장에 나오며 휘몰아치며 큰불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출판 작업을 잠시 멈추고도 얼마간 글을 쓰지 못했다. 그동안 학생 사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들었던 생각들이 계엄 이후 더욱 복잡하게 얽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12월 13일, 신촌 연세로에 4,5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모였다. 전국 대학총학생회 공동 행동이 주최한 전국 대학생 총궐기 집회다. 수는 신촌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대학생 총궐기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대학생 총궐기에 대한 소식이 거의 공유되지 않았던 학내 사회 대신 지도 앱에 표시된 우회 안내를 보고 그날 열리는 광장을 알게 된 것이다. 탈정치화된 학생 사회의 고요는 수에게 번번이 아쉬움과 무력함을 가져다주었다.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전에도 정치나 자원의 분배를 두고 옥신각신할 때 행정 차원이나 주변에 의해 막히는 일이 되게 많았어요. 잠재적으로 이해관계가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는 별로 닿을 수 없더라고요. (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수는 회의감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저 바깥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았다.

지운 역시 그 고요에 실망과 단절을 느꼈다. 학과 소속을 밝히며 올렸던 대자보를 준비하며 지운은 학과 차원의 성명문 발표에 대한 의견도 제시했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굳이’ 학생회 이름으로 대자보를 낼 필요가 있냐는 거였다. 그러나 학생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 지운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계엄의 밤 이후 지운 앞에 펼쳐진 것은 그동안 학생 사회를 가로지르고 있던 침묵의 민낯이기도 했다.

학생 집단을 대표하는 대의 기구인 학생회는 어떤 의견이라도 대변할 의무가 있는 것이죠. 다른 의견이 있다는 이유로 의견 표출 자체를 묵살해버리는 것은 학내 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의견 또한 표출하면 될 일이니까요. (지운)

탄핵소추안 의결을 하루 앞두고 열렸던 12월 13일의 전국 대학생 총궐기는 그 침묵을 깨고 ‘순수’하고 ‘중립’적인 대학생만의 이야기를 담아보자는 취지로 열렸다. 대학생만의 목소리를 지향한 이날의 집회에서 학생들은 계엄 이후 마주할 세계에 대한 각자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카이스트 총학생회장은 작년 2월 학위수여식의 국가 폭력이 하나의 씨앗이었다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남용을 규탄했다. 서울교육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일방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교육개혁과 불법집회로 규정되어 온 서이초 교사 49재 등을 언급하며 학생들에게 민주주의를 떳떳하게 가르치게 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의 발언은 수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학교 안팎에서 활동하며 2010년대까지의 학생 운동과 지금의 학생 사회에 대해 고민해 온 수에게 지금의 대학생은 예비 직업인이다. 80년대의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다. 각자가 공부하고 일하고 준비하는 분야를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언대에 선 총궐기의 대학생들을 보며 수는 새삼스럽게 ‘예비 직업인’으로서의 대학생 정체성을 실감했다. 그렇기에 수는 지금의 대학생에게 다른 삶의 방식과 맞닿을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좋은 대학교에 입학하고 서울에서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의 가정 형편이 되는 대학생이 대부분이잖아요. 뭔가 지금의 대학생은 빈곤이라든지 장애라든지 그런 다른 삶과 맞닿을 기회가 없는 것 같아요. 지금보다 더 다양한 집단과 만나고 엮이고 연결되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수)

대자보부터 시국 대회까지 학내의 움직임을 한자리에 모았던 13일의 총궐기 외에도 학생 사회는 저마다 모여서 계엄 이후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 그중 하나가 이담이 속한, 학교 안팎의 다양한 의제에 대해 배우고 행동해 온 서강대학교의 인권 실천 소모임 ‘노고지리’다. 계엄 다음날 노고지리의 대자보에는 ‘앞으로’에 대한 고민이 가득 담겼다. 탄핵이 되고 목표가 이루어지고 나면 김이 빠지지는 않을지. 우리가 여태껏 광장 위에서 쌓아왔던 연대가 ‘윤석열 구속’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그리고 새로운 생활을 꾸려나가는 과정에서 누구를 더 소외시키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지. 대자보를 쓰는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 그 고민이 이어지고 있다고 이담은 말한다.

이담은 세상을 망쳐놓은 것은 오로지 윤석열뿐이라는 듯 그 어떤 고통에도 일조하지 않은 것처럼 구는 사람들에 화가 났다. 우리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에, 그 고통을 생산하는 구조 자체에 저마다 기여하고 있지 않은가. 계엄 이후 제일 먼저 들려온 말이 “윤석열만 없어지면 좋은 세상이 된다”라니. 2016년 박근혜 탄핵 당시에 했던 이야기의 반복에 힘이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후 학생 사회에서, 광장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지켜보며 이담은 희망을 얻었다. 대자보를 쓰고 나서 노고지리 친구들은 모두 다른 일을 했다. 누군가는 집회에 나가 무얼 할지 이야기했고 누군가는 글을 썼다. 이담은 10명의 사람들과 계엄 이후의 상황과 생각을 나누는 학내 집담회를 열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광장에 나아가는 노고지리를 지켜보며 이담이 새삼스럽게 확인한 것은 ‘우리’ 안의 차이다.

한 방향으로 모이면 당연히 일이 더 쉬워졌겠지만 각자 하고 싶은 일을 각자의 자리에서 하면서 재미있는 활동들을 더 많이 했었어요. 너 진짜 니 같은 거 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굉장히 서로 응원과 의대를 많이 얻었죠. (이담)

우리가 서로 다 다르니까, 제각기 다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변화는 이담에게 새로운 효능감을 선사했다. 우리의 삶을 우리 손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서로 다르지만, 너의 자리에서 내 자리에서 이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 그 감각이 이담은 좋았다. 누굴 직접 체포하거나 끌어내릴 수 없어도, 그래서 사실 자신이 정치로부터 되게 멀어져 있구나 하는 무력감이 몰려와도 그 새로운 감각을 떠올리면 괜찮아졌다.



1부 3장: 우리가 만난 광장들

너와 내가 다르고,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 그렇기에 작년 겨울의 광장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각자의 기억에 자리한다. 3일 새벽부터 체포 이후까지 쉴 새 없이 내달리는 탄핵정국 속에는 수많은 광장이 있었다. 탄핵을 촉구하기 위해 표결하는 바로 그곳을 둘러싸고 모여야 했던 12월 7일과 14일의 국회만이 아니다. 탄핵소추안이 의결되고 난 후에도 광장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옮겼다. 깃발은 광화문 앞 도로와 공터에서 이어서 흔들렸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구호는 기업의 본사 앞에서, 대사관 앞에서, 지하철 역사 안에서 울려 퍼졌다. 길이 막힌 자리나 행진의 목적지에서도 광장은 생겨났다.

12월 7일, 가장 급박했던 여의도의 광장으로 돌아가 보자. 내란의 밤이 끝난 뒤부터 국회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 발의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4일 오후 2시 40분, 국민의힘을 제외한 6개 야당, 총 191명의 국회의원이 탄핵소추안을 발의한다. 그리고 탄핵소추안이 본회의에서 보고된 5일로 넘어가는 새벽, 72시간의 타이머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통령 탄핵소추는 본회의 보고를 기점으로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표결에 부쳐지지 않으면 자동 폐기된다. 72시간이 끝나는 시간은 8일 새벽이었기에, 7일 토요일 오후로 표결이 예정되는 것이 유력했다.

이날 여의도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떤 열차도 섬에 정차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대방역에서 내린 시민들은 강을 건너고 다리를 넘어 여의도로 향했다. 대로와 공원 군데군데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표결 상황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시민들의 분노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김건희 특별법’ 표결이 부결되었다는 소식 뒤로, 국민의힘 국회의원 전원이 퇴장했다는 소식이 떴다. 탄핵 소추는 국회 제적인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하다. 108명의 여당 의원이 퇴장한 순간 이날의 표결은 불성립으로 끝이 났다.

투표 불성립이 확정된 이후에도 시민들은 국회 앞을 떠나지 않았다. 국회 본청을 떠난 108명의 국회의원 이름을 부르며 돌아오라고 소리쳤다. 탄핵소추 투표 불성립을 근거로 제2의 내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새벽에도 시민들이 남아 국회 앞을 지키기로 한 이유다. 또다시 내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걱정에 늦은 시간에라도 국회 앞으로 달려온 시민들도 있었다.


우려했던 2차 계엄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탄핵 소추안 투표 불성립은 많은 국민의 분노를 야기했다. 여의도와 전국 각지에서 집회가 이어졌다. 2차 탄핵 소추안 표결이 예정된 12월 14일 오후 시민들은 국회 앞에 모였다. 7일 오후만큼이나 여의도는 함성과 시민으로 꽉 찼다. 지운과 이담 역시 여의도에 있었다. 국회에 가까워질수록 인터넷이 끊기고 문자나 통화 역시 연결되지 않았다. 본회의장을 생중계하는 스크린은 저 멀리 있었고, 몇몇 인터넷이 되는 소수의 시민들이 주변에 뉴스를 전했다. “이제 투표 시작이다.” “국회의장이 발언한다” 등등. 시민들은 가결을 기다리며 피켓을 들었다. 해가 한참 길어진 오후 늦게 함성이 터졌다. 국회 쪽에서 그 뒤쪽으로, 더 뒤쪽으로 함성이 퍼져나갔다. 뉴스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가결됐다’는 목소리를 듣고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모두 일어서 기쁨을 공유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되었다. 아직 끝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지운과 이담 그리고 많은 시민은 잠시의 환희를 누렸다.


이제 집회는 광화문으로 자리를 옮긴다. 탄핵 결정 여부는 이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시민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국회-헌법재판소를 거쳐 윤석열을 탄핵하는 일과 윤석열을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수사하고 기소하는 형사재판은 별개다. 12월 21일 오전 11시부터 광화문은 여러 단체의 집회로 북적였다. 오후부터는 시민들이 한데 모여 “윤석열 체포”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한편, 22일 새벽 0시, 광화문 집회를 마치고 서초구 남태령으로 이동한 시민들은 밤을 지새우기 시작한다. 한덕수 직무대행의 ‘농업 4법’ 거부권 행사를 이유로 전국농민회총연맹은 16일부터 트랙터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시내 진입을 앞두고 그들은 가로막혔다. 경찰은 교통 혼잡을 이유로 남태령에서 차벽을 세우고 진압을 시도했다. 그 장면을 SNS를 통해 접한 시민들이 하나둘 남태령으로 모여 인파를 이루었다. 하필이면 밤이 제일 긴 동짓날. 농민을 위해 모인 시민들이 서로를 확인한다. 이들은 청년이거나 노년, 활동가이거나 학생, 퀴어, 여성, 장애인이기도 하다. 이들은 한 명씩 발언대에 올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중간중간 경찰에게 “차 빼”를 외치며 긴 밤을 지새운다. 이담은 남태령에 함께하지 못했으나 밤새 지켜본 유튜브 라이브를 통해 그 기나긴 밤을 기억한다.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기막힌 연대의 현장, 민주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서로를 이렇게까지 끌어당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약 32시간의 대치 끝에 경찰은 길을 연다. 이른바 ‘남태령 대첩’이 성공하는 순간이다. 혹자는 시민이 만들어낸 기적의 순간으로 남태령 대첩을 평가한다.

‘기적’ 같은 일들은 여럿 있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윤석열 체포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관저의 경호처와 대치하다 철수한 1월 3일, 대통령 관저 인근 한남동에서는 “체포영장 집행”을 부르짖는 집회가 열린다. 무려 3일부터 5일까지 2박 3일, 대설주의보가 발령된 날들이었다. 시민들은 은박지를 두르고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잠에 들었고 아침이면 다시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쳤다. 마치 초콜릿 브랜드 ‘키세스’와 비슷한 시민들의 모습에 “키세스 시위대”라는 별명이 붙었다. 5일 이후에도 공수처의 미진한 체포 영장 집회를 규탄하는 집회는 전국 각지에서, 한남동에서, 광화문에서 이어진다.

그리하여 붙여진 1월 11일 토요일 집회의 이름은 ‘‘윤석열 즉각 체포·퇴진! 사회대개혁! 6차 범시민 총궐기대회’였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 행동에 의해 12월 7일 토요일 여의도에서부터 매주 진행되어 온 범시민 대행진은 광화문에서 여섯 번째를 맞았다. 총궐기대회를 본고장 삼아 사전 집회, 물품 나눔, 오픈 마이크, 부스와 푸드트럭들이 빼곡히 자리 잡는 모습이 이제는 낯선 일상이 되었다.



2부 1장: 분화하는 광장

1월 11일 토요일은 윤석열 체포 영장 집행을 앞둔 날이었다. 맑고 높은 겨울 하늘 아래로 사람들이 속속들이 광화문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윤석열 즉각 체포·퇴진! 사회대개혁! 6차 범시민총궐기대회’는 오후 4시에 예정되어 있었지만 한참 전인 오후 1시부터 광장은 시끌벅적했다. 다 같이 표결을 지켜보며 노래에 맞춰 같은 구호를 외쳤던 국회의 광장은 겨울 내내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했다. 고궁박물관 앞에는 금속노조의 키세스 포토존이, 대로변에는 거대 플랫폼 갑질 규제,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공공 서비스 민영화 중단과 같은 여러 의제를 외치는 부스들이 줄지어 자리했다. 광화문 앞 거리를 돌아다니며 굿즈와 피켓을 받고 설명을 듣고 사진을 찍는 모습은 이제 집회의 익숙한 광경이다. 광장은 이제 윤석열의 조속한 체포와 처벌을 외치면서 동시에, 탄핵 이후 세상에 대한 여러 목소리를 모두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11일 광장에는 여러 사전집회도 열렸다.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의 광장 사업과 선전전, 윤석열퇴진대학생시국대회, ‘국민의힘 지금 당장 해체하라! 청소년 엽서쓰기 행동’, 페미니스트 시국 발언대까지, 마이크를 타고 여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시끌벅적한 광장에서 이제 시민들은 마음껏 앞으로 만날 세계를 꿈꾸기 시작했다. 이 시끌벅적함은 광화문뿐만이 아니다. 1월 11일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근처에서도 또 다른 광장이 열렸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집단학살 규탄 한국 시민사회 32차 긴급행동’ (이하 팔레스타인 연대 집회) 이다. 청계천이 시작하는 지점에서 진행된 집회는 이스라엘이 자행한 학살에 대한 팩트체크, 팔레스타인 현황 공유, 연대 방식에 대한 고민 등을 말하고 나눴다. 청계천 양옆 높은 건물들 사이로 사람들이 모여 깃발을 들었다. 다리 난간에는 ‘멈추자 이 학살을’ 문구가 적힌 현수막이 걸렸다. 일렬로 앉은 사람들 앞에서 시민 발언이 이어졌다.

오후 3시 반이 지나고 본 집회 리허설이 시작되자 시민들은 다시 동십자각 앞으로 모여들었다. 거리 곳곳에서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는 같은 스크린을 보고 아스팔트 도로 위에 모여 앉았다. 제각기 다른 자리에서 흔들리던 깃발들도 대열의 양옆으로 줄지어 섰다. 그리고 구호를 외쳤다. 광장은 그렇게 쪼개지고 다시 합쳐지며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이 날 본집회에서는 ‘우리가 똑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윤석열 체포와 퇴진을 외치는 ‘다양한 분노’를 담은 시민 발언이 이어졌다.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은 2년 전 겪었던 투쟁과 연대의 경험을 공유하며 1월 17일과 18일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는 민주주의 대행진에 함께해달라고 외쳤다. 91년 신촌에서 백골단에 맞아 사망한 경대와 같은 학번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시민이 백골단의 부활에 대한 참담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기후 위기는 민주주의도 모든 존재의 삶도 아주 천천히 아래에서 파괴해 간다며 발전 노동자 해고와 에너지 민영화 중단을 촉구하는 발언도 뒤를 이었다. 마이크를 잡고 준비한 말을 쏟아내는 시민들의 목소리에는 12월의 겨울밤 내내 광장을 키워온 분노와 그 투쟁의 광장이 우리의 일상에 뿌리내리길 바라는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발언이 계속될수록 동십자각 앞 텅 빈 도로는 점점 겨우내 봤던 ‘우리’의 모습이 되어갔다. 익숙한 듯이 사람들은 응원봉을 꺼내 들고 깃발을 흔들며 ‘윤석열 체포’와 ‘윤석열 파면’을 외쳤다. 삶의 한 켠에 광장이 자리하는 감각은 이제 낯선 것이 아니다. 12월 3일의 반동으로 자라난 광장은, 그리고 그 광장이 낸 균열로 만난 세계는 또 무엇을 바꿔놓았을까.



2부 2장: 거리와 통신망 사이에서

광장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이는 건설된다기보다는 형성된다는 의미에 가까우며, 용어의 핵심적 조건은 물질이 아닌 실천에 있다. ‘모이고 떠들고 주고받는’ 어디든 그곳이 바로 광장이 된다. 당신과 나 사이 한마디 말이 오갈 때마다, 광장은 자꾸만 그 저변을 넓혀 나간다.

다채로운 존재와 발언-둘은 필연히 함께한다-이 한데 모여드는 현상이 선행하며, 그 뒤에 광장이라는 명명이 따라붙는다. 계엄 직후 순식간에 ‘광장이 된’ 여의도의 평범하던 도로와 공원은 그야말로 상술한 단계를 거쳐 자리 잡은 이번 정국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전통적인 광장이 수많은 군중들이 발이든 바퀴든 디디고 서로 붙어 설 수 있는 육지의 넓은 공터였다면, 이제는 그 공간이 온라인이라는 광활한 세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이 분명하다. 통신을 통해 오가는 자연어의 정보들은 더 이상 가상이 아닌 실재계에 속한다. 오히려 각종 SNS와 커뮤니티가 일상화되며 밀려드는 글자들을 훑고 복제하고 입력하고 전송하는 방식으로 줄곧 군중을 체험해 온 것이 지금의 청년 그리고 소년들이다. 인스타그램에 “뿅뿅” 눌리는 하트들(), X(구 트위터)에서의 치열한 찬반 논쟁(유진), 네이버 뉴스 댓글 창에 몰려드는 답글의 행렬까지(가연). 네트워크로 이어진 교류의 장에서 현안과 여론을 파악하기란 청년들에게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삐삐에서 휴대전화로, 스마트폰으로 우리의 전자기기가 발전해 온 과정에 발맞춰 온라인 세계는 무수히 많은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온라인 공간은 이제 현실에 대한 반응이 모이는 장소를 넘어 현실 사회를 구성하는 기능까지 떠안게 되었다.

온라인 공간은 생활과 논의의 지평을 넓게 열어젖힌 것으로 보이나 그 모든 이면들이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 듯하다. 가연이 온라인 광장에서 경험한 것은 단절이다. 어떤 의견을 온라인에 작성하면 그 의견에 반대하는 이들이 몰려와 댓글을 쓴다. 온라인은 익명성을 위시하여 모두의 의견이 개방되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그 의견으로만 상대방을 판별하게 되는 장소다. 가연은 ‘같은 국민’이라고 생각했던 집단이 분명한 경계를 기점으로 찢어지는 현상을 목격한다. 계엄 이후 모든 SNS를 탈퇴했다.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어떤 의견이 얼마나 호응을 받았는지 즉각적으로 판별된다. 그런데 다수의 호응이 꼭 옳음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는 그래서 SNS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X에서 RT(리트윗) 많이 탄 의견을 사회의 주류 의견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계엄을 일으킨 윤석열이 극우 유튜브를 보는 것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SNS를 탈퇴하니 달라진 것이 있었다. 수는 남태령에서 있었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의 투쟁 상황을 공유받기 어려웠다. ‘남태령 대첩’에 많이 참여한 2030 여성들은 X를 통해 소식을 공유받고 빠르게 집회에 합류할 수 있었다. 수는 오프라인 광장이 진정한 광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 고민한다. 어떤 집회는 분명 비슷한 의견을 공유하는 특정 커뮤니티를 바탕으로 파생되었다. 수는 연고 없는 이들이 우연하게 만날 수 있는 광장을 꿈꾼다. 자신의 관심사와 알고리즘으로 건설되는 온라인 공간을 ‘온라인 광장’이라고 명명하기는 물론, 그로부터 이루어지는 오프라인 광장의 모습조차도 진정한 ‘광장’이 되기 어려워 보인다.

수의 경험처럼, 24년 12월 물리적 광장의 재등장은 온라인 공간을 오랫동안 향유해온 이들에게 하나의 사건과도 같다. 물론 이렇게 적으면 그간 수많은 농성과 축제와 행진의 현장에서 노동-장애-여성-퀴어-동물-환경, 그 너머 각종 수많은 의제의 가시화를 이끌어온 활동가들로부터 분에 찬 호통을 들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위 진술을 변호할 근거가 있다. 지금의 20대에게 일상의 광장은 대부분의 경우 온라인이었다. 운동도 분쟁도 참여도,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 진행되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청년들은 언제나 모일 공간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2019년 들이닥친 팬데믹은 오프라인 활동의 흐름을 끊었다. 팬데믹의 세력이 수그러들던 2022년부터는 각종 시민 행동들이 다시금 전개되었으나 ‘초대받지 않은’ 청년들은 여전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계엄을 계기로 온라인으로만 접하던 여러 현장에 직접 참여한 청년들은 이제 연대에 초대장이 필요하지 않음을 안다. ‘말벌 시민’이라는 별명을 얻은 이들은 이제 어디든 달려 나간다. 12월 3일의 계엄이 결과적으로 실물 광장으로의 ‘초대장’이 된 셈이다.



2부 3장: 연결과 불화의 민주주의를 향해

집회의 경험, 다시 말해 광장의 경험이란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온라인 공간을 통해 상상하고 꿈꿨던 ‘광장 민주주의’와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한 데 묶어내는 것이 온라인 공간이라면 광장에서는 하나의 시간과 공간을 광장의 모두가 공유한다. 낯선 이들이 살 부딪히며 동일한 구호를 서로 다른 목소리로 외칠 때 우리는 ‘구호 아래 하나 되었다’는 연대감을 느끼기도, ‘같은 구호 속에 저마다 다른 정체성이 생동하고 있다’는 불화를 느끼기도 한다. 광장을 통해 우리는 연결과 불화를 재-감각하며 이른바 ‘이상적인 광장’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거나 새로운 이상을 정립해 나간다.

“함께 구호를 외치고 행진할 때 결속감이 크게 들었어요. 같이 함께 있으니까.”

계엄 이후 지방에서도 집회가 이어졌다. 가연의 동네, 전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연은 수제 피켓을 들고 풍패지관 앞 도로에 앉아 구호를 외쳤다. 계엄 직후부터 연일 열리는 집회에 대부분 참석했던 가연은 시민발언대에도 올랐다. 이곳에서 가연은 이전까지와는 다른 결속감을 느꼈다. 온라인에서 가연이 느낀 것은 단절과 고립이었다. 온라인 뉴스에 자신의 생각을 담은 댓글을 남길 때 가연은 종종 반대 의견이라는 이유로 무수히 달리는 덧글을 마주했다. 우리가 아니라는 감각은 온라인 상에서 유난히 두드러졌다. 하지만 전주 객사의 집회에서는 ‘우리들’이 있었다. 직접 만든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할 때, 저마다의 방향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달리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행진을 통해 ‘우리’가 가시화된다고 느꼈다. 행진에 모인 사람들의 일상만큼이나 저마다 다른 피켓을 들었음에도 피켓에 적힌 문구, 목소리로 발화되는 구호를 통해 가연은 ‘우리’를 찾았다. 가연에게 오프라인 광장은 분명 누군가의 정체성이나 배경과 무관하게, 같은 구호를 외칠 수 있다면 ‘우리’가 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용인하지 못하는 이들도 현장에 있었다. 유진은 12월 7일의 광장을 기억한다. 휠체어를 타고 집회에 참석한 유진에게 “휠체어를 타고 이런 데를 왜 왔냐”고 묻는 이들. 페미당당 활동가 심미섭씨의 발언을 들은 몇몇 참가자들은 “레즈비언이 여길 왜 와” 따위의 말을 뱉기도 했다. 같은 구호를 외치기 위해 광장에 왔으나 그 속에서도 혐오가 존재했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말은 목소리를 더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유진에게 큰 단절로 다가왔다. 하지만 동시에, 혐오 발언을 향해 “레즈비언이 어때서요?”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라고 맞받아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유진은 단절의 감각을 넘어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가늠한다. 휠체어 이용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집회 환경을 개선해 나가는 주최 측과 참여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발언대에 경사로가 설치되고 휠체어 이용자를 위한 공간이 신설되었다. 혐오 발언을 뱉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게 되지만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리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자리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가 요즘 유진의 주요한 고민이기도 하다.

이담 역시 광장을 통해 비슷한 고민을 안게 됐다. 이담은 한강진 집회에서 들었던 발언을 기억한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는 옆집 아저씨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고, 저 건너편에 있는 혐오 세력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이담은 자신이 일하는 홈리스야학에 소속된, 윤석열을 지지하는 학생을 떠올렸다. 함께 철거민과 노점상 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에 참석했고 야학 활동으로 민중가요를 부르지만 투표소에만 가면 보수 정당을 찍게 된다고 말하던 학생. 이담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기만 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이담에게 광장에서의 투쟁은 반대편에 있는 집단을 사회에서 몰아내기 위한 활동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편의 이들까지도 ‘우리’가 될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공간이다.

지운은 이러한 가능성이 부재한 광장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다. 지운에게 광장은 하나의 의제에 동의하는 시민만이 모여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닮았는지 확인하는 공간이라기보다, 다양한 정체성과 일상을 지닌 시민들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지운이 경험한 광장은 윤석열 탄핵 이후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헌정 체계가 대통령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음이 다시금 밝혀진 시점에서, 다른 내란을 방지하기 위한 논의보다는 다음 정권이 누구에게 넘어갈지에 집중하는 진영논리만 팽배한 공간이었다. “저 진영은 안 돼”, “이 진영이 옳아” 따위의 배타적인 언어는 끝내 광장 민주주의의 좌절을 불러온다고 지운은 생각한다.

“구호는 외칠 때마다 위험한 기분이 들어요”

는 광장에서 ‘우리’가 붕괴하는 파열의 흔적을 발견한다. 수는 계엄이 선포되었던 12월 3일 국회의사당 앞을 되새긴다. 수와 친구는 계엄 해지 결의안이 가결되었을 때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을 보며 ‘이곳이 유토피아가 아님’을 느꼈다. 새벽 두 시 넘어 시민단체들의 발언과 함께 애국가를 부를 때도 수는 생각한다. 광장의 누군가는 역사적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왔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왔다. 그러나 수는 역사적 현장이라서 국회 앞에 온 것이 아니라 윤석열의 계엄 선포를 목도한 후 ‘무엇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왔고, 사랑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일상을 지키기 위해 왔다. 당시 여의도에서 울려 퍼진 “윤석열 탄핵”이라는 구호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구호로 쉽게 변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목표를 갖고 모였을 때 그것이 자칫 단일한 목표로 변질되어 버리는 찰나. 수는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시민들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지워지지 않도록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장에서의 경험이 단절과 불화로 인한 좌절만을 남긴 것은 아니다. 는 12월 13일 신촌의 대학생 총궐기 현장에서 다양한 발언이 쏟아진 후, 다 같이 구호를 외칠 때 우리가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갖고도 “탄핵”을 외치고 있다는 연결을 느낀다. 광장에는 분명히 다양성이 확장되는 순간이 산재해 있었다. 이담은 광장이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집회에서 어떤 의제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그다음 집회에는 그 의제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광장은 매 순간 넓어지고 있었다. 광장의 확장은 이담에게 스스로의 확장이기도 했다. 계엄 사태 이전까지 광장에 나설 때 이담은 ‘즐거운 운동’을 쫓았다. 우악스럽게, 자신의 삶을 내팽개치며 운동에 참여하는 이들로부터 거리감을 느껴왔으나 계엄 사태 이후 광장에서의 경험은 ‘즐겁지 않은 운동’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생활이 있고 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떤 투쟁은 엄중하고 극렬한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담에게 광장은 가려진 정체성과 환경을 가시화하는 장소였다.

유진도 확장을 목격했다. 지난 24일 안국역에서 있었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집회는 이전과 달리 서울교통공사의 진압으로 해산되지 않았다. 시민들이 “시민을 보호해라!” 외친 덕이다. 유진은 계엄 이후의 광장에서 그 연대의 힘이 촉발됐다고 느낀다. 이제껏 전장연이 시민에게 피해를 끼치고 공사 직원들이 그것을 막는다는 프레임이 씌워져 있었다면, 광장에서의 경험은 진정한 책임을 따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에 더해 유진은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 일상에서 소외되었던 어떤 정체성이 광장을 통해 드러날 때, 그 정체성을 많은 시민이 지지할 수 있을 만큼 광장이 열렸음을 확인할 때, 유진 역시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을 발견한다.

“집회에서 굉장히 많은 소수자가 자신을 드러내고 커밍아웃하잖아요. 저도 용기를 얻었어요. 나를 좀 더 드러내도 괜찮겠구나.”

이번 겨울 광장에서 연결과 불화의 순간은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했다. 광장에서 누군가는 이전에는 찾을 수 없던 ‘우리’를 직접 눈으로 발견했고 누군가는 저 편의 사람들까지 ‘우리’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았다. 하나 된 ‘우리’를 위해 너무 쉽게 지워지고 밀려나는 존재들을 보며 불쑥 고개를 드는 두려움도 있었다.

겨울이 지나가고 나면, 아마 ‘우리’는 해체될 것이다. 어쩌면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일상을 뚫고 자라났던 수많은 광장에서 당신이 느꼈던 연결과 불화를 말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산산조각의 형태로 그곳에 모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우리를 위해 언제나 다시 모일 수 있음을. 그것이 ‘우리’의 광장으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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