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손맛, 길들여진 입맛, 그리고 이어진 사랑의 온도
“삼복의 시작, 초복입니다.”
무더운 여름 한복판, 우리 조상들이 이어온 지혜로운 전통, 바로 ‘몸보신’의 날이지요.
거리마다 삼계탕 냄새가 퍼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더위를 이겨낼 힘을 보충하죠.
저희 집에도 초복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자연스레 삼계탕을 끓이며 여름의 시작을 알리곤 했으니까요.
사실 평소에도 닭을 사서 삼계탕을 자주 끓여 먹는 편입니다.
이제는 습관이자, 작은 의식처럼 자리 잡은 일상이죠.
하지만 오늘의 삼계탕은 조금 달랐습니다.
시어머니의 삼계탕, 낯섦에서 시작된 사랑의 맛
어릴 적 친정에서 먹던 삼계탕은 찹쌀이 푹 퍼져 죽처럼 부드러웠습니다.
마치 이유식처럼 뜨끈하고 순한 목 넘김이 좋았지요.
그런데 결혼 후, 시어머니께서 끓여주신 삼계탕은 전혀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싱싱한 닭에 황기만 넣고 푹 삶은 뒤, 불린 찹쌀을 마지막에 살짝 넣어 끓이셨죠.
찹쌀이 충분히 퍼지기도 전에 그릇에 담아 김치 하나 곁들여 상에 내셨습니다.
그 찹쌀은 죽이라기보다는 탱글탱글한 밥알에 가까웠습니다.
톡톡 터지는 식감이 처음엔 낯설고 어색했지만, 며느리를 위한 정성으로 끓인 그 맛은 어느새 제 입맛을 사로잡았죠.
그렇게 저는 시어머니의 삼계탕 맛에 길들여졌습니다.
이제는 탱글탱글한 찹쌀 식감이 ‘가장 완벽한 삼계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어진 세월, 이어진 손맛
세월이 흘러 시어머니가 삼계탕을 끓여주시던 시간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그 손맛을 이어갑니다.
닭 한 마리와 황기를 넣고 푹 삶은 뒤, 불린 찹쌀을 마지막에 넣고 1분 정도만 더 끓인 후 그릇에 담아내고, 김치 하나 얹어 상에 냅니다.
가족들이 탱글탱글한 식감에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집니다.
‘아, 이렇게 사랑이 전해지는구나’ 하고요.
낯익지만 조금 다른 온도의 삼계탕
초복 날, 마침 딸과 함께 미사를 드리러 성당에 갔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니 성당 식당에서 점심을 나누고 있었고, 메뉴는 다름 아닌 ‘삼계탕’이었습니다.
딸이 “엄마, 우리 이거 먹고 가자~” 하며 웃었고, 저도 그 말에 이끌려 식탁에 앉았습니다.
딸과 삼계탕 한 그릇씩 주문했지만, 저는 밖에서 파는 삼계탕은 잘 먹지 않습니다.
대부분 제 입맛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뚜껑을 열자마자 마음이 살짝 멀어졌고, 머리가 지끈해져 식욕도 점점 사라졌습니다.
결국 닭살 몇 점만 건져 먹고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죠.
반면 딸은 한 그릇을 뚝딱 비우며,
“맛있다! 남은 건 내일 회사에 가져가야지~”라며 포장해 갔습니다.
그 아이에겐 그 삼계탕이 충분히 맛있고, 무더운 초복을 견딜 보양식이었던 거죠.
사랑은 맛을 따라 흐른다
삼계탕 한 그릇에는 세월의 흐름, 입맛의 변화, 그리고 가족 간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손맛이 제 입맛을 길들였고, 이제는 제가 가족의 입맛을 길들이는 중입니다.
그리고 제 딸은 또 자신만의 ‘삼계탕 맛’을 찾아나가겠지요.
어쩌면 중요한 건 삼계탕 맛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끓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사랑의 온도’가 더 중요한 게 아닐까요.
시어머니의 따뜻한 손길 속엔 며느리를 향한 정성이 있었고,
성당에서 나눈 삼계탕 한 그릇엔 봉사자들의 마음이 담겨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끓이는 삼계탕엔 가족을 향한 저의 사랑이 담겨 있겠지요.
삼계탕 한 그릇에 담긴 이야기
삼계탕 한 그릇에 이토록 많은 시간과 감정, 그리고 이어지는 마음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참 놀랍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오늘입니다.
저마다 기억 속 한 그릇의 음식이 있겠지요.
그 음식에 담긴 사랑과 추억은 우리를 다시 그때 그 자리로 데려가 주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음식에 당신만의 추억과 의미를 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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