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 줍던 날, 검정 고무신 속에 스며든 엄마의 마음
겨울 바다에서 미역을 줍던 엄마의 뒷모습.
차가운 바닷물 속에 서 있던 그 작은 등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음 깊이 따뜻하게 스며듭니다.
제 어린 시절의 겨울 바다는
그 어떤 놀이공원보다도 신비롭고,
때로는 아찔한 모험의 공간이었습니다.
마을에서 한 시간 남짓 걷다 보면
드넓은 겨울 바다가
코끝을 시큰하게 감싸 안는
짠 내음을 풍기며 기다리고 있었죠.
그리고 그 바다의 끝자락에는,
겨울바람이 잔잔해지는 어느 날
파도가 실어다 놓은 검은 보물,
바로 미역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특별한 날이면
아버지가 손수 깎아주신
엄마 키보다 훨씬 긴 대나무 장대를 들고
설렘 반, 긴장 반의 마음으로
엄마를 따라 나섰습니다.
차가운 들판을 지나
탁 트인 겨울 바다를 마주할 때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드넓은 바다는
푸르고 아득한 색으로
겨울 햇살을 머금고 반짝였죠.
하지만 모래사장에 발을 딛는 순간,
설렘은 곧장 불편함으로 바뀌곤 했습니다.
검정 고무신 속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검은 모래알들이
비집고 들어왔고,
푹푹 빠지는 모래 위를 걷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닷물 가까이 다가갈수록
모래는 점점 단단해졌고,
발걸음도 한결 편해졌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몰랐던 그때,
그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도착해보면
이미 부지런한 동네 아주머니들이
바다를 한가득 누비며 미역을 줍고 계셨죠.
가까운 모래 끝자락의 미역들은
이미 누군가의 품에 들어가 있었고,
진짜 보물은
저 멀리 차가운 바닷속에서
검게 일렁이며 우리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가 주신 긴 대나무 장대를
능숙하게 휘두르며
파도 너머의 미역을 끌어당기셨죠.
내 눈에 비친 엄마는
마치 한 편의 멋진 춤을 추는 무용수 같았어요.
그 모습이 참 신기하고 멋졌어요.
더 많은, 더 좋은 미역을 건지기 위해
엄마는 주저하지 않고
차가운 겨울 바닷물에 발을 담그셨습니다.
무릎까지,
때론 그보다 더 깊이 들어가시기도 했죠.
그럴 때마다 나는
엄마가 파도에 휩쓸려
멀리 떠내려갈까 봐
심장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엄마! 엄마! 들어가지 마!"
어린 목소리로 아무리 외쳐도
엄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미역 건지기에만 몰두하셨습니다.
내 목소리는
거센 파도 소리에 묻힌
작은 새소리 같기만 했습니다.
야속함과 조마조마함 속에서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미역이고 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하지만 엄마는
시간이 멈춘 듯
묵묵히 미역을 줍고 계셨습니다.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검은 미역이 가득 담긴 망태기를 옆에 두고,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끝없이 움직이셨죠.
겨울 해는 짧아서
금세 어둠이 찾아왔고,
우리는 겨우 어스름 속에서야
집으로 향하는 긴 길을 걸었습니다.
차가운 바다 냄새가
옷깃에 스며들고,
발은 시리고,
몸은 노곤했지만
엄마의 얼굴에는
오늘 하루의 수확에 대한 만족감이
가득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저 차갑고 무서운 바다였고,
야속하게만 느껴졌던 엄마의 뒷모습이었지만
이제는 압니다.
그 차가운 바닷물 속에서
땀 흘리며 미역을 줍던
엄마의 손길 하나하나에
가족을 먹이고 보듬으려 했던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었음을요.
검정 고무신 속에 들어온
모래알처럼 거칠고 고단했던 삶 속에서도
엄마는 오직
자식들을 위한 따뜻한 밥상만을 생각하며
묵묵히 헌신하셨다는 것을
이제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엄마의 사랑이 스며든 바다 냄새는,
오늘도 제 기억 속에
짠하게, 아련하게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