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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수선 Aug 24. 2021

소박하고 고고한

<이토록 고고한 연예>(김탁환)을 읽고

 입은 귀까지 찢어지고, 코는 문드러지고, 그 위에 왕방울만 한 눈이 두 개 얹어져 있는 수표교 아래 거지 왕초 달문. 그는 제일 낮은 곳에서 정도(正道)를 걷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가 걸은 길이 잘 닦여져 곧은길은 아니었다. 도성에선 수표교 거지로, 인삼가게 점원으로, 산대놀이 으뜸 광대로, 조방 꾸니로 살던 달문은 어느샌가 통신사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또 어느샌가 나라 없는 섬에서 살기도 하고, 또 어느샌가 유랑단을 이끌고 남에서 북으로 팔도를 따라 유랑하기도 했다. 그다음은 두만강을 건너 청나라로 그리곤 다시 조선으로. 이리저리 굽이굽이 살아온 그의 인생길은 곧은길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없이 낮은 곳을 향하는 마음과 사람을 믿는다는 신념이 비추는 그의 길은 한없이 곧은길이었다.


 책 속에서 묘사된 달문의 모습을 보고 두 가지가 동시에 떠올랐다. 조선의 달 항아리와 이양연의 한시 야설. 둘 다 하얗고 곧고 소박한 심상을 담고 있는 작품인데 달문이 내딛는 발걸음이 이 심상들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했다

최영욱, karma, 2017, 76 × 70cm mixed media on canvas
구본창, vessel, 2006 C-print, Image size 63 × 50cm, Frame size 96 × 80cm


 달 항아리의 부드럽고 풍만한 곡선과 은은한 흰 빛의 유약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졌다는 생각이 든다. 볼 것 없는 밋밋한 표면인데도 불구하고 뚫어져라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달 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낸 김환기 화백은 달항아리를 두고 "굽이 좁다 못해 둥실 떠 있다."며 자유와 아방가르드 정신을 이야기했다.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는 달 항아리와 같은 조선 백자를 보고 "자연스러운 무심함"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달문의 모습은 이와 같다. 어딘가 묶여 있지 않고 자유롭게 두둥실 떠다니는 사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낮은 곳에 머무는 사람. 자신에겐 무심하여 꾸미지도 않고 가지지도 않으려는 사람이 달문이다. 내가 달 항아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는 것과 당시 조선 사람들이 달문을 목 빠져라 기다리던 것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순수하고 조용한 아름다움은 이렇게 사람들을 매혹시키나 보다.


 소설의 말미에서 달문은 자신의 신념을 '사람에 대한 믿음'이라 이야기한다. 자신의 모든 행동은 사람들을 믿음으로서 시작되고 믿음으로서 끝난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이런 달문의 모습이 멍청하게 손해만 보고 사는 것으로 보였을 테다. 하지만 달문은 그에 개의치 않고 여전히 사람을 믿으면서 살아간다.



穿雪野中去  천설야중거

不須胡亂行  불수호란행

今朝我行跡  금조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이양연 <야설野雪>


눈을 밟으며 들판을 걸을 때면

함부로 어지럽게 걸어가지 마라

오늘 아침 나의 행적은

곧 뒷사람이 밟고 갈 길이 되려니



 달문이 걸은 행적은 눈 밭에서도 곧은 행적이었다. 그리고 그가 눈 밭에서도 곧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가슴 깊이 뿌리내린, '사람을 믿는다'는 자신만의 신념 때문이었을 테다. 선과 옳은 신념에 기초한 길은 걷기에 막막하다. 가야 할 길은 길고 유혹도 많다. 설령 눈이라도 덮이면 길이 안 보일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문은 앞만 보며 천천히 자신의 걸음을 내딛는다. 


 세상 이치(문)에 다다랐다(달)는 이름을 가진 조선의 으뜸 광대. 정작 그는 자신은  글도 모르고 한낱 비렁뱅이라며 저 이름을 어색하게만 느꼈던 사람이다. 하지만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 속 달문은 역시 이름만큼 인생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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