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의 그림자

by 황혜림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 골목 건너편 건물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그 빛이 카페 창을 스치며 들어와 창가 자리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는 카운터에서 그 자리를 자주 바라봤다. 손님이 없어도 의자 위에는 이상하게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여겼다. 가로등 때문이겠거니, 빛이 굴절돼 생긴 착각일 거라고. 하지만 어느 날, 가로등이 고장 나 꺼져 있던 날에도 그 그림자는 그대로 있었다. 그림자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어깨가 좁고,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치 바깥 풍경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어느 비 오는 날,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긴 우비 끝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카페 한가운데를 지나 창가 자리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이 자리, 지금 누가 앉아 있나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없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의자 옆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 손길이,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 섬세했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여기, 앉아 있잖아요.”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대답을 잃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꺼냈다. 사각사각, 연필심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카페 안의 고요를 채웠다. 몇 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스케치가 끝나자 그녀는 책장을 넘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종이를 찢었다. 그리고 내 앞에 내밀었다. 거기에는 창가에 앉아 있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짙은 그림자 속에서도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이 사람… 아시나요?” 나는 잠시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혹시 다시 나타나면, 이걸 전해주세요.” 그리고 그림을 접어 창가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날 밤, 창가 그림자는 사라졌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보이지 않았다. 빈 자리는 햇볕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선 더 이상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2주쯤 지나 늦은 밤 문을 닫으려던 순간, 창가 위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그녀가 남겼던 그림이었다. 다만 이번엔 종이 가장자리에 빗방울이 스며 있었고, 종이가 약간 구겨져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 한 번은 쥐어졌다가 돌아온 흔적이었다. 그날 이후, 창가 그림자는 다시 나타났다. 예전처럼 조용히, 마치 자기 자리를 되찾은 사람처럼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그림자는 단순한 빛의 장난이 아니라, 누군가의 이야기가 머무는 자리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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