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창밖에 빗방울이 가늘게 흩날리고 있었다. 비는 바닥까지 닿기도 전에 흩어져 하얀 안개처럼 골목을 감쌌다. 그 속에서 한 남자가 우산도 없이 걸어왔다. 문이 열리자, 빗물 냄새가 카페 안으로 번졌다. 그는 말없이 카운터로 다가와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보았다. “핸드드립, 시간 오래 걸려도 괜찮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드리퍼와 주전자를 꺼냈다. 원두를 갈아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부었다. 원두 향이 퍼지자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치 그 향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이 소리… 좋네요.” 그가 말했다. 물줄기가 가는 선으로 떨어져 원두 위에서 작은 호수를 만들었다. 그 호수는 서서히 가라앉으며 진한 갈색의 커피를 흘려보냈다. 그는 커피가 다 내려질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잔이 그의 손에 들어가자 그는 한참 동안 온기를 느끼기만 했다.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면 좋겠어요. 조용하고, 느리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그는 커피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물었다. “혹시… 기다리는 분이 계신가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만, 떠나기 전엔 시간을 조금 훔치고 싶어서요.”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오래도록 잔 위의 김을 바라봤다. 마치 김 속에 과거의 장면들이 숨어 있는 것처럼. 한참 후에야 그는 첫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작은 웃음을 지었다. “이 맛… 예전에도 마신 적 있어요. 그땐 아주 오래된 카페였죠. 창문이 나무틀이었고, 주전자는 구리로 된…” 그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묻지 않았다. 대신, 그가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옆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우리 둘 사이의 시간은 정말로 느리게 흘렀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비가 그쳤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여기서 보낸 시간, 기억 속에서 오래 데우겠습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그의 잔을 씻지 않고 창가에 올려두었다. 비친 빛 속에서 잔 안의 커피 자국이
마치 시계처럼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알았다. 그가 훔쳐간 건 커피가 아니라, 그 안에 잠겨 있던 시간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