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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반복된다.

경향신문 폐간 사건(1959년 4월 30일)-치졸한 대법원

by 케빈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 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 결정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 1959년 2월 4일 자 경향신문의 칼럼 “여적”에 실린 일부분


1959년 2월 4일 경향신문 칼럼 여적에서 ‘다수결의 원칙을 논하기에 앞서 한국적 현실에서는 선거가 다수의 의사를 공정히 반영할 수 있느냐가 먼저 문제가 된다.’며 선거가 이런 역할을 하지 못할 때에는 진정한 다수의 의사를 강제로 전달하는 폭력 혁명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다.


당시 경향신문은 가톨릭 재단이 소유한 보수파 신문으로 1인 장기집권 체제를 추구하던 이승만의 자유당 정부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이승만의 정적인 장면의 민주당 신파 계열과 가까운 사이로 여겨져 자유당 정부의 눈총을 받고 있었는데 이 칼럼으로 인해 편집국장 강영수가 당일 연행되었다. 문제의 칼럼을 쓴 필자는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맡고 있던 주요한인 것으로 밝혀졌고 결국 주요한과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가 기소되었다.


여적 칼럼이 도화선이 되어 경향신문은 스코필드 박사가 폭로한 ‘제암리 학살 사건’, ‘사단장 기를 팔아먹고’ 등 기사에서의 허위 사실 보도와 여적을 통한 폭력 선동 등을 이유로 형법과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4월 폐간 명령을 받았다. 경향신문은 5월 5일 서울고법에 행정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재판부는 폐간 57일 만인 5월 26일 경향신문 발행허가 취소 행정처분의 집행을 정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장 홍일원 부장 판사는 오필선 서울고등법원장이 하루에도 몇 차례 씩 불러 정부 측 승소를 강력히 종용했고 김두일 대법관도 역시 같은 요구를 했었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자유당 간부 중에는 홍일원 판사를 없애버리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고, 처갓집 친척의 은행계좌까지 조사하는 등 보복을 계속했다고 한다.


정부는 법원에 의해 경향신문의 폐간 취소 결정이 내려지자 일곱 시간 만에 경향신문에 대해 무기정간 조치를 또다시 내렸다. 경향신문은 이 조치에 대해서도 맞대응했는데 이번에는 서울고법에서 정부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경향신문 측은 즉각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대법원은 이를 3개월이 지난 후에 대법관 전원으로 구성된 대법원 연합부에 회부했고, 연합부는 또 2개월이 지나서야 군정법령 88호의 위헌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며 헌법위원회에 위헌여부 판단을 제청했다. 그런데 당시 헌법위원회는 국회의 양원제 채택에 따라 민의원 3인, 참의원 2인, 대법관 5인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참의원이 만들어지지 않아 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대법원이 이렇게 시간을 끌며 경향신문의 입을 묶어놓으려는 정부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사이에 4.19가 터졌다.


제2대 대법원장 조용순


대법원은 너무도 정치적이었다. 아니 정치적이라기에는 너무 치졸하게 속 보이는 짓을 했다. 헌법위원회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던 대법원이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하자 몇 시간 만에 경향신문 복간을 허용한 것이다. 대법원의 기회주의적 태도에 가장 분개한 것은 서울고법, 서울지법 등 하급법원의 판사들이었다. 이들은 가처분 결정 바로 다음 날 긴급회의를 열고 조용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의 사퇴권고를 결의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조용순 대법원장은 5월 11일 물러났다.(한홍구-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사법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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