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증 치료제 투약기
'눈치 빠르다.'
처한 상황이나 남의 마음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능력이나 성향을 의미하는 말이다.
난 다른 사람의 '의중'을 잘 읽는다. 그리고 그 '의중'은 곧잘 맞는 경우가 많았고 주변으로부터 눈치 빠르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나는 그게 능력인 줄 알고 40년을 넘게 살았다.
하지만 그게 좋은 게 아니었다. 나는 타인이 하는 행동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습관은 직장생활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는(혹은 그녀는) 아무런 의미 없이 업무상 필요한 이야기를 한 것일 뿐인데, 나는 그 이야기에서 '의중'을 읽어내려 애썼다. 남의 마음을 알고 싶은데 그쳤으면 다행이련만 나는 남이 하는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모든 의미를 부여했고, '저 사람이 왜 저러지?', '내가 뭐 잘 못 한 게 있나?' 하며 원인을 나에게서 찾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런 성격이기도 하다. 좀 지고 살고, 조금 손해 보며 살자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남한테 좋든 말든 자기만족으로 그렇게 굽히고 포기하고 산다. 모든 원인은 내게 있는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이런 나의 성격은 지나치게 나를 소심하게 만들었고 지나치게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 예민이 많은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 생각들이 불면의 밤을 보내게 했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그날 하루 해내어야 하는 일이거나 날씨, 혹은 가까운 미래의 여행 계획이나 약속이어야 할 텐데 미운 누군가를 떠올리며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그 사람은 나한테 그랬을까?" 하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다.
'남을 미워하지 않게 하는' 약은 없지만 어찌 되었든 내가 먹는 약들은 그런 생각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 주었다. 첫 약을 먹었다고 드라마틱하게 숙면을 취한 건 아니다. 약을 먹어도 중간중간 깨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간에 깨고 다시 바로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첫 투약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