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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사 Mar 27. 2022

암전과 검은빛

단편

고상한 척을 하는 것에 질렸다. 온 세상이 고상한 척을 하고 있는 꼴이 보기 싫었다. 가끔은 다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A는 생각했다. 그는 꽤 영리했다. 주위에 사람도 많았고, 그 사람들에게 적당한 태도로 적당한 믿음을 주는 일도 그에게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게 그의 세상은 지루하고 순조로웠다.


그러다 일이 벌어졌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각을 잃은 것이다. 원인 모를 재앙이 전 인류를 덮쳤다. 우리 모두는 질서를 잃어갔고, 도시에 빛은 사라졌으며,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모두 불안에 떨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이기적이여 졌고, 누구보다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미디어에서 이 사실을 공표하고 재난 알림이 왔어야 했다. 하지만 TV를 틀어도 불편한 노이즈만 들릴 뿐 아무런 긴급뉴스도 들리지 않았다. 모두가 시각을 잃은 상황에서 어떻게 큐사인을 보내고 어떻게 방송 송출을 하겠는가. 당연한 이야기였다. 다만 집안으로 파고드는 외부의 절규가,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소리가 A의 감각을 곤두서게 했다. 분명 일이 벌어졌구나, 나만 이런 게 아님을 직감하게 했다.


A는 영리했다. 모두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회에서 가장 자유로운 이가 떠올랐다. 옆집에 살던 B였다. 그는 날 때부터 시야가 어둠이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나락이 평범한 세상이던 사람을 찾았다. B는 A를 살아가게 했다. B는 A에게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알려주었다. 점자를 읽는 법을 알려주었다. 지팡이를 손에 쥐어주었다.  모두가 시각을 잃으면서 식량, 식수 공급이 어려워졌을 때에 A는 B를 따라 집 밖을 나와 마트에 다녀올 수 있었다.


그 둘은 친구가 되었다. 서로의 집을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A는 B에게 말했다. "가끔 거지 같은 세상이 멸망하는 상상을 했었어. 내가 마지막 인류가 되는 상상 말이야." B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A는 혼잣말처럼 말을 이었다. "다 같이 망하면 억울하지 않겠지라고 생각했어. 그런데도 왠지 조금 억울하네. 예고도 없이 암전이라는 게. 줬다 뺐는 게 제일 나쁜 거잖아." B는 가만히 A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그의 이야기를 아주 천천히 시작했다.


B는 태어날 때부터, 어둠의 가운데에 놓였다. A가 암전이라고 부르던 세상을 B는 검은빛이라고 불렀다. 빛을 본 적이 없지만 존재함을 알기에, 어둠을 검은빛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림자의 형태가 궁금하면 검은 그림자, 비의 형태가 궁금할 땐 검은 비. 앞에 검은을 붙여 그는 본인의 세상을 채웠다. "어린 시절 내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된 이후에 난 한참을 방황했어. 그렇잖아, 나만 결핍되어 있다는 게. 애들 다보는 만화영화 캐릭터를 나만 못 보는 게 " 이번에는 A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책으로, 이야기로 알게 된 새로운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면서 날 일으켰어.. 내 시야에 보이진 않아도 이 어둠 어딘가에 있다는 마음으로."


B의 이야기에 A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감으나 뜨나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눈꺼풀을 닫았다. 그리고 천천히 어둠을 채워나갔다. "검은빛에서 검은 길로 검은 내일로." 암전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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