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봄이 오면, 어김없이 학교에서 학부모 회의 일정이 날아온다.
3월의 공기 속에는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긴장감과 설렘이 함께 섞여 있다.
그 설렘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 나에게도, 학교에서 열리는 그 한 자리는
작지만 중요한 ‘사회적 역할’의 무대가 되어준다.
그날도 나는 거울 앞에서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차분하게 메이크업을 마친 후 학교로 향했다.
형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늘 이런 자리에 성의 있게 준비하고 싶었다.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이고 싶었고,
누구보다 내 자신에게 당당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아이들이 학업도, 생활도 잘 해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학교 학부모 단체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이내 그 안에서 다양한 엄마들을 만나고,
함께 교류하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익숙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부모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살짝 망설이던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우리, 같이 어디 다녀올 수 있을까요?”
순간, 나는 조금 당황했다.
말은 조심스럽지만, 어딘지 모르게 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아, 또 그런 거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사실 나는 안다.
사람들은 나를 볼 때, 자주 ‘겉모습’만 본다.
화장을 하고, 옷을 조금 신경 써 입고,
말투나 제스처가 조금 정제되어 보이면
그것만으로도 쉽게 선입견을 갖는다.
‘잘 노는 여자일 것 같다’거나,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건 참 얕은 판단이다.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굳이 해명하자니,
또다시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는 피로가 찾아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 기억 한켠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한 가지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무렵, 나는 작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레슨이 가득했지만, 오전은 상대적으로 시간이 비어 있었다.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운동도 되고, 정신도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수영 수업은 정오쯤 끝났고, 나는 학원 수업 준비를 위해
늘 수영 후 샤워를 하고, 다시 메이크업을 하고, 단정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나의 프로페셔널한 루틴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함께 수영을 배우던 한 분이 내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은… 혹시 뭐 하시는 분이에요?”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피아노 학원 운영해요”라고 답했더니,
그분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 역시! 뭔가 좀 다르더라구요.
다른 분들은 그냥 수영 끝나면 쌩얼로 집에 가는데,
선생님은 매번 화장도 하시고 옷도 깔끔하게 입으셔서…
혹시… 뭐, 사업하시는 분인가 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분의 말에는 악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이면의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나의 단정함은 누군가에게 ‘꾸밈’으로 보였고,
그 꾸밈은 또 누군가에게 ‘의도’로 비쳐졌던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성격이다.
대학교 시절, 친구들이 "오늘 나이트 갈래?"라고 물으면
나는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두려웠고,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집, 책, 음악이 훨씬 더 편안하고 소중한 세계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의 겉모습만 보고,
때로는 조금은 가볍게, 때로는 은근한 거리감을 두며 나를 해석했다.
그건 어쩌면, 이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오래된 방식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꾸민 여자 = 가볍다'는 등식 말이다.
나는 이제 그런 시선들에 너무 상처받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그 안에서 나를 지키는 힘을 더 단단히 다져가고 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할 수는 있어도,
나는 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화장을 하고, 차려입는 이유는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건 내 하루를 정돈하고,
내가 나를 존중하는 방식일 뿐이다.
나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나’로서 내 삶을 책임지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은 화려하거나 특별하지 않지만,
매일 아침 내가 나를 위해 내리는 작은 선택들로 채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