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와병 중에 남편의 책이 세상에 나왔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박병상 선생님이 조촐하게나마 병실에서 출간 기념식을 갖자고 전해왔다.
사람이 병상에 누워 있는 마당에 웬 기념식인가 싶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아끼는 후배의 마지막 길을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 않게 밝혀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제안이었다.
그날 병실에는 여러 분이 모여 주셨다. 박병상 선생님, 장성익 선생님, 예진수 선생님, 오성규 선생님이 먼 길을 달려왔다. 박병상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처음 뵙는 분들이라 많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다들 남편을 아끼는 마음만은 진실하게 전해졌다. 최성각 선생님, 이수종 선생님은 사정상 오시지 못했지만 따뜻한 성의를 보내주셨다.
사람들은 병상에 누운 남편을 둥글게 둘러섰다. 그 순간의 풍경은 기묘하게도 출간 기념식이라기보다 임종을 지켜보는 듯한 분위기에 가까웠다.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는 저자의 머리맡에, 이제 막 세상에 나온 그의 책이 놓였다. 그리고 그 책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둘러서서 사진을 찍었다.
책은 세상에 태어나고 있었는데, 저자는 점점 생의 끝으로 기울고 있었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이 같은 공간에서 교차하는 장면이었다.
저자가 싸인을 해줄 수 없는 처지였으니, 나는 기념식에 참석한 분들께 부탁을 드렸다. 각자 그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책 속에 적어달라고. 언젠가 그가 가져갈 수 있도록.
“최성일 선생! 아니, 내 후배! 결코 잊지 않을게.” ─ 박병상
“새로운 책 출간을 축하드리며, 그간 정말 많이 수고하셨습니다.” ─ 장성익
“아름답고 해맑은 영혼 성일이! 책을 사랑하는 동지로서 늘 함께 할거야.” ─ 예진수
“최성일 선생님께. 늘 새롭고 깊게 들여다보시려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 오성규
짧은 글귀였지만, 한 문장 한 문장이 깊은 애도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남편이 남긴 책은 이제 저자 자신이 건네지 못하는 인사와 싸인을 대신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낯설고 기이한 광경 앞에서 마음이 서늘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그의 몸은 점점 쇠해가고 있었지만, 그가 남긴 책은 이제 홀로 걸음을 떼며 또 다른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책이 그의 목소리가 되어 남은 이들의 손에 건네지고, 그의 이름을 오래도록 붙잡아 줄 것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위안처럼 다가왔다.
잠자는 남편 곁에 놓인 책 한 권은, 더는 눈 뜨고 펼쳐볼 수 없는 그를 대신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생명이었다.
(당신이 떠나기 31일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