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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Sep 23. 2024

간병일기 94

인연

인연


보슬보슬 비가 내린다. 남편 대학 동기 한 분이 병실을 들렀다. 그분과 남편은 과거에 각별한 사이였다고 알고 있다. 남편 친구분이 가끔 그녀의 이름을 거론하며 남편을 놀리는 것을 듣기도 했다. 남편은 군 입대 후에도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인의 관계를 이어갔지만 결국은 서로 다른 길을 갔다고 했다. 나를 만나기 전이니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물어볼 여지도 없었고 이미 끝난 관계였으니 더더욱 할 말은 없었다. 남편과 그녀는 과 커플이었으니 그녀는 나의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걸어 남편을 만나러 와도 되냐고 물어왔다. 대학 동기들에게서 남편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만나고 싶으면 만나는 것이지 그의 배우자에게 꼭 허락을 받아야할 일인가 싶었다가 그게 도리이기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심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지만 남편이 내가 아니라 긴 머리를 한 예쁘장한 그녀와 살았다면 지금처럼 죽음의 길을 들어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잠깐 하게 되었다. 


그녀는 옛 애인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병실을 찾았는데 남편도 그녀가 보고 싶었을까. 표현은 하지 못하지만 그도 이 세상의 인연을 떠나기 전에 잘 갈무리하고 싶었으리라고 믿고 싶다. 한때 연정을 품었던 사람들이니 사별하기 전에 그들이 맛보았을 기쁨과 슬픔, 고통 등을 마주 잡은 손과 눈빛으로 다 해소했길 바랐다. 사람을 못 알아봐도 이 만남이 어떤 의미인지 남편은 무의식중에 알아챘다고 믿고 싶다. 이 만남을 잘 받아들였다고 여기고 싶다. 맺은 인연의 끈을 잘 풀었길 바란다.


그젯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해 몇 겹의 밤을 보낸 것 같았다. 날이 밝아 왔을 때는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느껴졌고 하루 종일 멍을 때렸다. 어젯밤에는 그런대로 잠이 들어 머릿속의 이물감은 덜 하다. 내가 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심리적 안정감이 있어서 남편을 찾아온 그녀를 맞이할 수 있었다.


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 감정 노출을 삼가고 접을 것은 접자. 남편 책에 대한 독후감을 마무리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독파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이들의 요구를 너무 과민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표현은 안 해도 아이들도 이 상황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울 것인가.(2011년 6월 1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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