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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매듭

by 인상파

마지막 매듭


보슬보슬 비가 내렸다. 남편의 대학 동기 한 분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였다. 과거의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대학 시절, 두 사람은 한때 연인이었고, 군 입대 후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이어갔다고. 그러나 결국 서로 다른 길을 선택했고, 이제는 아득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와 남편이 만나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내게는 질투도 시샘도 없었다. 다만 가끔 남편의 친구들이 그녀의 이름을 흘리듯 언급할 때면, 그 시절의 남편이 나와 있을 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음을 막연히 짐작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다. 남편의 소식을 동기들에게 전해 듣고, 마지막으로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배우자인 내게 허락을 구하는 그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동시에 조금은 쓸쓸했다. 사실, 만나고 싶다면 그냥 오면 되는 일 아닐까. 하지만 인연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이미 끝났더라도 마지막 순간에는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은 법. 나는 흔쾌히 오라 했다.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남편은 눈을 뜨긴 했으나 곧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믿고 싶었다. 의식의 깊은 어딘가에서, 그는 분명 그녀의 목소리와 온기를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무심한 눈빛 속에서 오히려 오래된 연정을 풀어내는 마지막 흔적을 보았다. 말이 없더라도, 몸짓이 없더라도, 인연의 매듭은 그 순간 고요히 풀려나갔다.


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질투는커녕, 오히려 안도감 같은 것이 찾아왔다. 남편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든, 이 만남으로 그는 오래 묵은 끈을 단정히 묶고 떠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생에는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매듭이 있다. 그것을 잘 풀어내야, 남겨진 자도 담담히 떠날 수 있다.


그날 밤, 나는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잿빛 하늘 아래에서 몇 겹의 밤을 보낸 듯, 새벽녘까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지만 낮이 밝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마도 그 만남 덕분이었으리라. 인연의 마지막 매듭이 제자리를 찾았다고 믿고 싶었다.(당신이 떠나기 30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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