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아미타불
그가 떠난 이튿날 입관식이 이뤄졌다.
장의사 둘이 그의 몸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동안 나는 그의 차가운 손을 잡고 마지막 말을 던졌다.
아이들 잘 키우겠다고, 둘째 형님 잘 만나시라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미안하다고…
장의사들이 그의 얼굴에 화장을 하려 해서 말렸다.
그는 그런 인위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살아서도 얼굴에 스킨이나 로션을 바른 적이 없던 사람에게, 죽어 서까지 화사한 얼굴을 씌우려 하다니.
언제부터 죽음에도 가면을 씌우게 되었을까. 그것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죽은 자는 죽어 알 수 없으니, 결국 살아 있는 자를 위한 것일까. 파리한 얼굴빛이 싫어 색을 칠하는 저 행위를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의사 중 한 사람이 움푹 파인 입에 솜을 집어넣고 쌀을 집어넣는다.
한 섬이요, 두 섬이요, 석 섬이요. 동전으로 노잣돈도 챙긴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그는 관에 눕혀졌다. 이제 죽은 얼굴조차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와 맺은 이승에서의 인연은 끝이 났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점점 편해진다. 괴로운 것인지 황홀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물속에 있는 것인지, 방 안에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어디에서 어떻게 있건 상관이 없다. 그냥 편하다.
아니, 편안함 그 자체도 느낄 수가 없다.
세월을 잘라내고, 천지를 분쇄하여 불가사의한 태평으로 들어간다.
나는 죽는다. 죽어서 이 태평을 얻는다.
태평은 죽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고맙고 고맙도다. —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
당신도 죽음을 대면하여 태평을 얻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의 물독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니, 그저 죽음으로 스며들었다고 믿고 싶다.
그리하여 죽음과 한 몸이 되어 육신을 벗어던지고 영혼을 저 허공 중으로 풀어내셨겠지요.
괴로움도 슬픔도 서러울 것도 없는 한 생.
그렇게 자연 속으로 스며들어야 희구하는 태평을 얻는 것이겠지요.
여보, 부디 그곳에서는 평안하시기를.
(당신이 떠나고 입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