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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Dec 30. 2023

오늘의 운세 18

마음이 느긋해진다

오랜만에 식당 아르바이트가 들어왔다. 알바가 있는 날은 어머님을 평소보다 일찍 센터에 보내야하기에 깨울 때가 되면 은근히 걱정된다. 혹시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안 일어나시겠다고 고집이라도 피우실까 봐서다. 다른 때 같으면 센터에 전화를 해서 늦게 모셔가게 할 수 있지만 일이 있는 날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평소 잘 일어나시지 않으시면 쓰는 수법을 오늘 써먹었다. 식당에 가야 하니 빨리 일어나시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식당을 당신도 따라가보겠다며 선선히 일어나셔서 화장실로 향했다. 하지만 센터 차가 도착했을 때는 그런 사실을 다 잊고 순순히 차에 오르셨다.

식당에 가면 먼저 하는 일은 배달 나갈 식판과 식기를 챙기는 일이다. 그리고 야식으로 사용된 식판을 설거지한다. 마른 밥풀에 들러붙은 음식물로 설거지가 쉽지 않지만 헹구는 물에 불렸다가 식기 세척기에 돌리면 깨끗해진다. 다들 바쁜 아침이지만 그래도 몸에 필요한 카페인을 섭취하는 시간 정도는 만든다. 분위기로 마시는 게 아니라 각성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니까 커피잔은 중요한 게 아니다. 커피를 스텐 국그릇에 타서 마신다. 

올봄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나와서 이 국그릇용 커피잔을 보고는 많이 놀랐다. 너무 없어 보인다고 할까.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커피 정도는 머그잔을 준비해서 마시면 보기도 좋고 마시기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식당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생각이었다. 용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마시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말 분위기를 따질 계제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에 마실 커피는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설거지거리를 조금이라도 용이하게 하는 국그릇이 제격인 것 같았다. 

시각이 미각에 영향을 준다고 하지만 그런 시각에 현혹되지 않았을 때가 또 있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식구들끼리 둘러앉아 커피를 마실 때는 국그릇이며 밥그릇을 사용했다. 식후에 커피를 숭늉처럼 마실 때였다. 서울에서 직장을 얻은 큰언니가 돈을 벌어 집에 커피세트를 선물로 보내왔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집이 별로 없었다. 부모님은 큰딸이 보내준 그 귀한 것을 당신들만 드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 자식들에게도 맛보게 하려고 그렇게 선심을 쓰셨던 것이다. 특히 겨울에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언니가 끓인 물을 양재기에 퍼 오면 거기에 커피와 프리마, 설탕을 넣어 섞고는 가족들이 무슨 보약이라도 되는 양 마셨던 기억이 있다. 

집에서는 원두커피를 마시지만 식당에서는 믹스 커피를 마신다. 일을 하려면 몸속이 든든해야하니 카페인만으로는 부족한 탓이다. 그 힘으로 식당을 쓸고 닦고 나면 몸에서 땀이 난다.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빗자루로 쓸고 마대 물걸레로 밀고 나면 허리가 곱아 오는 느낌이다. 한숨 돌리고 주방 보조를 하면서 재료를 다듬고 씻고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식판 닦는 일을 맡는다. 300개 정도의 식판에 국그릇을 닦다 보면 머리가 하얘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리가 아파서 바로 설 수가 없다. 얼굴이 굳어가는 것을 알고 사장인 언니가 허리 아픈 동생을 위해 식판을 대신 닦아준다. 아르바이트 온 동생이 일을 못하니 일하는 식당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좀 더 쉬운 일을 찾는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정리하여 수저통에 꽂는 일이다.

30년 넘게 공장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언니는 내게 엄마 같은 존재다. 경제적으로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다. 식당 일을 끝내고 언니가 싸준 반찬들을 챙겼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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