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고생을 한다
마음 고생을 한다
파킨슨병을 앓던 큰댁 사촌 언니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예순다섯. 언니에게 병이 찾아온 것은 50대 후반이었다. 몸의 중심을 못 잡고 자꾸 넘어지는 게 병의 시초였는데 젊은 만큼 병의 진행 속도가 빨라 악화일로의 길을 걸었다. 언니는 세상을 뜨기 며칠 전까지 집에서 누워지냈는데 언니를 돌보는 일은 언니보다 7살 많은 형부의 몫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뵌 형부는 몰라보게 수척했고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수발하며 형부가 감내했을 고통과 슬픔이 어떠했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나와 언니는 10살 정도 나이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10살은 한 세대만큼의 차이를 보일 정도의 거리였다. 내가 대학까지 나온 것과는 달리 언니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으로 돈을 벌러 갔다. 어릴 적에는 그런 언니가 아주 옛날 사람이라고 여겼는데 겨우 나이 차이가 10살 정도였다. 큰아버지는 딸자식 교육에 유독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셨던 분이었다. 여자들은 가르쳐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기시며 어린 나이의 딸을 공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언니는 그렇게 돌봄을 받을 어린 나이에 일찍 어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공장으로 돈을 벌러 나갔던 언니가 명절이면 먹을 걸 사 들고 고향을 찾았다. 특히 언니는 초코파이를 처음 맛보게 해 준 사람이었다. 온정을 뜻하는 초코파이처럼 언니는 정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그때는 언니가 다 큰 어른이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스무 살 안팎이었을 나이였다. 어렸을 때는 왜 그리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언니처럼 어른이 돼 시골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과 다른 옷차림을 하고 어른티를 내는 언니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결혼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종종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면 언니를 볼 수 있었다.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다 4년 전, 언니의 아들 결혼식 때 보고 그 이후로는 보지 못했다. 언니 병이 더 나빠지기 전에 치른 아들 결혼식이었다. 언니는 휠체어를 타고 결혼식장에 나타났다. 그 이후 종종 사촌 형제들을 통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이렇게 비보를 받고 말았다.
장례식장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조용했다. 언니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언니의 죽음이 그런 고통을 끝내고 안식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사촌오빠와 언니 얘기를 하고 있는데 빈소로 큰 사촌오빠의 시골 친구들이 조문을 하러 왔다. 첫눈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었지만 그 낯선 얼굴에서 점점 동네 어르신들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40년이 넘은 세월을 뛰어넘은 얼굴들에서 마치 동네 어르신들을 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네 어르신들이 거의 돌아가시고 사촌 오빠 시골 친구들 또한 부모들보다 더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사촌 언니는 떠나가면서 많은 사람을 한곳에 불러모아 잠시 안부를 묻게 하고 삶을 되돌아보게 했다. 언니와의 몇 점 되지 않은 기억을 나누며 나는 일어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삶을 채웠던 몇 점 되지 않은 언니와의 기억이 느슨해짐을 느꼈다. (1.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