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의 『인생』
위화의 『인생』
삶은 왜 견디는가
위화의 『인생』은 고상함을 드러내려는 소설이다. 그가 말하는 고상함이란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다. 삶을 판단하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태도. 이 소설은 그 태도를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쩐지 밋밋하게 느껴진다. 푸구이 가족에게 연이어 닥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마주하고도, 그 삶에 끼어든 인생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고통은 분명 크고 깊은데, 그것이 절규로 터지지 않는다. 한 번 스쳐 지나가듯, 다음 삶으로 연달아 이어질 뿐이다. 마치 한 노인이 자신의 지난 삶을 이야기하듯, 책 열 권으로도 모자랄 이야기를 그저 덤덤하게 풀어놓는 것처럼.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삶은 노름과 주색잡기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더불어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 속에서 그의 가족은 농촌의 여느 농부들과 다를 바 없는 빈곤 속으로 내던져진다. 굶어 죽기 직전까지 내몰리는 시간 속에서 푸구이는 자식들과 아내, 사위와 손자까지 차례로 잃고 끝내 혼자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는, 자신의 아버지 나이에 버금가는 늙은 소 한 마리를 자신의 이름으로 부르며 함께 밭을 일군다. 그 모습은 비극의 끝이라기보다, 이상하리만큼 담담한 한 장면처럼 남는다. 마치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처럼.
이 소설에서 삶은 극복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극복할 수 없는 것 앞에서 어떻게 살아지는지를 보여준다. 푸구이의 삶은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이어진다. 가장 좋을 때는 추락하고, 가장 나쁠 때는 다시 살아내야 한다. 그 반복 속에서 인간은 운명을 바꿀 수 없고, 다만 그것을 감당할 뿐이다.
위화는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삶을 이끄는 어떤 거창한 목표나 희망이 아니라,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삶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 푸구이의 생에는 끝내 하나의 희망도 허락되지 않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소설의 고상함이 드러난다. 고통을 재단하지 않고, 선과 악을 나누지 않으며, 다만 인간의 삶이 그러했음을 보여주는 태도. 그러나 동시에 그 초연함은 현실과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독자는 그 삶 속으로 깊이 빠져들기보다, 한 발 물러서서 바라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절박한 체험이라기보다, 이미 지나간 남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내가 끝내 붙잡고 있었던 것은 푸구이의 삶이 아니라, 그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었다는 것을.
푸구이의 삶은 분명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더 어려웠던 것은 그 고통을 끝까지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는 일이었다.
보통 우리는 고통 앞에서 함께 무너지는 이야기에 익숙하다. 같이 울어주고, 같이 분노하는 이야기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따라가며, 견디기 힘들었을 한 인간의 생을 끝까지 들여다보게 만든다.
특히 그의 다음과 같은 말 앞에서는 더욱 그렇다.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이 말에서 어떤 이는 고상함과 태연함을 읽어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말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딘가 위험하게 느껴진다. 그 위험함은 가족들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순서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가 무너진 채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해지게 만드는 데서 온다.
차례가 뒤섞인 죽음들,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들이 결국 하나의 말로 눌려버리는 순간. 그래서 그 담담함을
쉽게 고상함이라고 부르지 못하겠다.
또한 그의 안심은 상실의 끝에서 얻어진 것이다. 더 잃을 것이 없기에 가능한 평온, 더 이상 걱정할 사람이 없기에 가능한 안도. 그것은 삶을 다 겪어낸 뒤의 평화라기보다, 삶이 모두 비워진 뒤에야 겨우 도달하는 정적에 가깝다.
그래서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이 담담함이야말로 끝까지 견뎌야 했던 또 하나의 시선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삶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삶을 견딘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견디고 있는지도.
푸구이, 그는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살아냈다.
그리고 나는 그 삶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여전히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질문이 남는다.
삶은 왜 견디는가.
어쩌면 삶은 견디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견디다 보니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의미를 알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그날을 넘기고 또 다음 날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살아 있는 쪽에 서 있게 되는 것. 푸구이의 삶은 그랬다.
삶에 붙이는 갖은 이유—사랑 때문에, 책임 때문에, 희망 때문에—그런 말들이 다 빠져나가고도 삶은 남는다. 그때의 삶은 이유 없이도 계속된다.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견디는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결심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돌아보면 이미 살아내고 있는 쪽에 서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