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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Feb 25. 2024

간병일기 18

미용실 가는 날

미용실 가는 날


오늘 당신은 축구 게임기를 갖고 아들 녀석과 함께 놀았다. 어린놈에게 져줄만도 한데 이상하게 점수에 연연하면서 아들보다 점수가 낮게 나오자 기분 나빠했다. 어린 자식놈 앞에서 지고는 못 사는 사람처럼 굴었다. 지는 것이 자존심 상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당신 특유의 강한 승부욕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자꾸 억지를 썼다. 당신보다 아들의 실력이 출중했건만 당신은 녀석에게 점수를 몰래 슬쩍 올렸다고 되지도 않은 말을 하였다. 아들 녀석은 하지도 않은 일을 아빠가 했다고 우기니 억울했는지 눈물까지 보였다.  


오늘 당신은 일주일 넘게 미뤄온 미용실 가는 것을 실행했다. 건선이 심한 머리를 미용사에게 들이미는 것이 미안하다고 당신은 니조랄 삼푸를 풀어 머리를 세 번이나 감았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두피를 가리고 있어 건선이 더 심해보였다. 방치하면 부스럼이 머리 전체를 뒤덮을 것 같았다.감은 당신의 두피가 불그스름하게 부풀어 올랐다. 허연 비듬이 사라질 날이 없는 당신의 두피다. 피부과 약을 신뢰하지 않는 당신은 약을 발라주겠다고 달려들어야 겨우 머리통을 내밀었다.


저녁 무렵  머리를 자르러 가자고 했더니 당신은 순순히 일어섰다. 다른 때와 달리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않았다. 미용실까지 동행하려고 했는데 당신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이들만 집에 두고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두운데 온전치 못한 사람을 혼자 보내고 나니 마음이 초조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몰래 당신의 뒤를 밟았다. 미장원이 다른 아파트 상가 건물에 있어 꽤 거리가 있었다.나의 최대 걱정은 이 저녁에 당신이 미용실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느냐였다. 길을 잃을 것이 걱정이었다. 아파트와 아파트를 잇는 구름다리를 건넌다가 당신은 주변을 힐끔거렸다.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같아 재빨리 나무 뒤로 숨었다. 아슬아슬하다 싶었는데 당신이 미용실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섰다. 길을 몰라 헤매는 줄로만 알았다. 

"여보, 어디로 가는 거예요?” 급한 마음에 큰소리로 당신을 불러세웠다. 당신의 뒤를 몰래 밟은 것이 아주 불쾌하다는 듯 당신은 차갑게 명령하듯 내뱉었다.

“날 따라왔어? 오지 말라고 했잖아? 집에 안 가고 뭐해? 뒤 따라오지 마.”

그 말에 당신 뒤를 더는 밟을 수 없었다. 뒤돌아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당신을 믿어보기로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나는 미용실까지 가는 당신을 보지 못했기에 극도로 불안에 시달린다. 욕조에서 물놀이를 하고 있던 딸아이의 머리를 감겨 말려주고는 동생과 컴퓨터 게임을 하며 놀라고 해놓고서는 다시 미용실을 향해 부리나케 달렸다. 당신이 길에 쓰러져 있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아, 그런데 미용실에 도착하여 유리창으로 삭발이 된 당신의 뒤통수를 볼 수 있었다. 감고 말릴 것도 없는 머리를 미용사가 드라이기로 말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나를 보고 생긋 웃어주는 당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얼었던 마음이 싸하게 녹는 기분이었다. 걱정을 지나치게 하는 것일까? 당신은 건재하다고 거울 속에서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데. 지나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기억이 깜박거린 사람을 혼자 어두운 길을 가게 할 수는 없으니. 그러다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니.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2010년 11월 20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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