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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04. 2024

간병일기 22

저녁 한때

저녁 한때


밤사이 비가 내렸는지 도로가 미끄러웠다. 남편은 어젯밤 10쯤 잠자리에 들었다가 오늘 오전 11시 30분까지 기척이 없었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 같이 세상 모르고 잤다. 집안일을 하다가 잠깐 잠깐 자는 사람을 들여다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다는 사실에 저으기 마음이 놓인다. 발작에 대해서는 늘 경각심을 갖고 있어서다. 


남편을 식물에 비유하자면, 수액이 말라가는 고목 같다고나 할까. 오랜 세월 풍파를 견뎌온 나무가 제 몸통을 비어가듯, 그 역시 속을 텅 비워내고 있는 것 같다. 그 빈 자리에는 쓸쓸한 바람만이 불고 그는 절대 절명의 고독에 갇혀버린 것 같다. 우리 사이에는 서로 교감할 만한 요소가 없어 보인다. 서로의 벽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집에 둘만 남은 저녁 시간, 그는 더 자기 세계로 깊이 침잠해버리는 것 같다. 우린 서로 다른 세계에서 부유하고 있는 종이 다른 생명체 같다. 이 지극한 이질감이 슬픔으로 번진다. 무심하도록 외로운 감정들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우린 둘 다 시간 속에 갇힌 수인들처럼 무력하게 시간에 허덕인다.

 

그가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은 그의 몸에서 생의 흔적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몸에 새긴 흔적들이 사라져도 순간순간 자연을 몸에 담았으면 싶은데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려 들지 않는다.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갈 생각을 못하는지도. 집앞 놀이터라도 함께 나가서 바람을 쐬었으면 좋겠는데 완강히 외출을 거부하고 있다. 집안만이 그의 세상이다. 억지로 시킨다고 할 사람이 아닌데 병중에 있으면서 더 완고해졌다. 부탁을 잔소리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싫다는 사람에게 더는 말을 걸지 않는다. 그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다. 얼굴 붉힐 일을 만들어서는 안 되리라. 소리가 나서 좋을 일도 없고 서로 마음만 불편할 테니.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자.

 

잃고 잊고 살다가는 것도 그런 대로 괜찮을지 모른다. 끊임없이 생각의 덫에 사로잡혀 이 질긴 끈을 놓지 못하는 사람보다 갑절은 인간적이지 않은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생각해도 답이 없는 삶에, 질리도록 골머리를 썩히는 사람보다 말이다. 그냥 흘러가는 시간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은 맡기도록 하자. 억지부리지 말고.


안개 낀 고즈넉한 저녁, 남편과 김민기의 오래된 노래를 듣는다. '친구'의 가삿말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가 내리 입안에 맴돈다. 구슬픈 곡조가 심금을 울린다. 삶이 그의 많은 노래 가사처럼 비통하고 서럽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2010년 11월 30일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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