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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상파 Mar 05. 2024

간병일기 23

피로인

피로인


심란하다. 낭떠러지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은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쓸쓸함과 적막함을 먹고 사는 생물마냥 어둡고 축축한 기운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고 있다. 길을 내고자 해도 어둠의 가시넝쿨에 막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어둠은 속성으로 자라 사납게 가시 손톱을 앞세워 목을 조이며 질식시키려 든다.


암 세포에 남편의 몸이 잠식되어 가고 있는데도 나라는 사람은 그런 남편 곁에서 실없는 ‘나’라는 존재에 물음표 던지기를 그만 두지 못한다. 머리를 복잡하게 치고 오는 이 잡념으로 스스로를 독방에 가두거나 우울의 늪속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다. 남편의 말대로 ‘안간힘’을 쓰느라고 머리가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편치 못한 이 집안의 분위기는 나로 인해 골방의 곰팡내를 피운다. 미안하면서도 그 미안함을 어쩌지 못해 좌불안석이다.


왜 이리 밸이 꼬인 걸까. 피로하고 또 피로하다. 아침 식탁 준비로 시작되는 집안일이 하루 종일 끝날 줄 모른다. 치웠다고 돌아서면 집안은 여전히 치우기 전처럼 어수선하고 먼지는 바닥과 책 사이를 부유한다. 


제 방에서 책을 보던 큰아이가 심심한지 동생과 함께 석고본 뜨기를 해도 되냐고 물어온다. 뒤치다꺼리가 귀찮아 못하게 말리고 싶었지만 허락했다. 둘은 신이 나서 신문을 깔고 찰흙을 만지고 물을 끓이고 야단이다. 피로하고 또 피로한 사람은 나이지 아이들은 아니니 얼마나 다행인가. 침울한 집안 분위기가 조금은 활기차진다. 아이들이 놀고 난 자리를 치우는데 힘이 부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무기력함이 사람을 자꾸 신경질적으로 만든다. 깡마른 마음으로 자꾸 성을 내게 된다. 절뚝이는 심신, 이 불구의 인간은 구제되기 다 글렀는지 모른다. (2010년 12월 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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