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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만식 Jul 05. 2023

감나무와 까치밥


   요즘은 날씨가 매섭게 춥고, 오늘따라 바람도 세차게 분다. 벚꽃이 활짝 핀 봄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 12월로 접어들었다.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분위기가 왠지 삭막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다.

   아내와 함께 아파트 정원을 나서는데,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에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감나무가 눈에 띄었다. "저 감을 한번 따먹고 싶은데ᆢ."라고 말하자 아내가 약간 놀라는 기색으로 "요즘 사람들은 감을 쳐다보지도 않아요."라고 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감나무에 달린 노란 감은 물론 설익은 파란 생감도 여러 번 따먹었다. 복사꽃이 피는 봄에는 친구들과 집 근처 갈야산(葛夜山)에 올라가 찔레순과 진달래꽃을 먹고, 늦은 봄에는 죽서루 건너편 가람 광장에서 아카시아꽃을 납작한 돌판 위에 구워서 맛있게 먹기도 했다.

   내 고향은 푸른 동해 바다가 보이는 영동지방이다. 경상도나 전라도 남쪽 지방이 감과 곶감으로 유명하지만, 영동지방도 따뜻한 기후와 토양 때문인지 가는 곳마다 감나무가 눈에 띄고 집집마다 정원수로 감나무를 많이 심었다. 밭이나 야산에도 키 큰 감나무를 쉽게 볼 수 있고 가을에는 단감이 넘쳐났다.

   시골 농가에서 곶감을 처마에서 말리는 광경도 자주 볼 수 있다. 늦가을에는 감나무에 빨간 홍시가 먹음직스럽게 주렁주렁 매달리간혹 홍시가 땅에 떨어지기도 다. 겨울철에는 홍시를 할머니가 광에서 꺼내 주셨고, 제사나 잔치 때는 어김없이 곶감을 먹었다. 당시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아마 곶감이라고 기억한다. 호랑이도 무서워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고향에는 감나무가 봄철 5~6월에 꽃이 피었다. 그 시절, 여자 아이들은 땅에 떨어진 하얀 감꽃을 실에 꿰어 자랑스럽게 목에 걸고 다녔다. 덜 익고 떨어진 감은 항아리에 소금물과 함께 넣고 따뜻한 부뚜막에 며칠 동안 올려놓으면 떫은맛이 사라지고 먹음직한 침시(沈柹)가 되어 간식으로 즐겨 먹었다.

   고향의 우리 집 정원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감나무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우리 집을 지으면서 정원수로 심으셨다. 당시 나는 집에 키 큰 대봉감나무가 여러 그루 있는 친구집이 무척 부러웠다.

   가을은 감이 익어가는 계절이다. 감나무에 탐스러운 노란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초록색 잎과 조화를 이루어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겼다. 나는 가을소풍 갈 때 감이 여러 개 달린 감나무 가지를 꺾어서 집으로 들고 왔다. 그리고 내 방에 걸어두면 멋진 한 폭의 정물화가 되었다.

   어머니는 단감을 무척 좋아하셨다. 매년 가을, 단감을 한 접씩 사시고 심심할 때 간식으로 즐겨 드시곤 했다. 나는 가끔 시장에서 노란 단감을 쳐다보면 단감을 맛있게 드셨던 어머니가 그리워 울컥할 때가 있다.

   옛날, 효성이 지극한 선비들은 홍시를 대접받으면 어머니 생각이 간절하여 차마 먹지 못하고 품속에 넣고 가져가 어머니께 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선생은 자신의 애통한 마음을 조홍시가(早紅枾歌)로 지었고 그 시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반중(盤中) 조홍(早紅) 감이 고와도 보이 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은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고향에는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키 큰 감나무가 종종 보였다. 추운 겨울에 까치나 겨울새가 날아와 연시를 부리로 맛있게 쪼아 먹고 갔다. 이 까치밥은 작은 생명 하나라도 배려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라고 한다.

   장편 소설 '대지'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 벅은 한국의 '까치밥'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펄 벅 여사는 1960년, 한국 농촌을 둘러보면서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려있는 감을 보고 이렇게 물어보았다. "저 높이 있는 감은 따기 힘들어서 그냥 놔둔 건가요?" 그러자 근처 주민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저것은 까치밥이라 하는데 겨울철에 새들이 먹으라고 남겨놓은 것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 펄 벅 여사는 이 말을 듣고 탄성을 지르며 말하기를 "나는 유적이나 왕릉만을 보려고 한국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한국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펄 벅은 그의 작품 'The Living Reed(살아있는 갈대)'에서 "한국은 고상한 민족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다"라고 예찬했다.


   스웨덴의 식물학자 툰베리(Thunberg)가 붙인 감나무의 학명 중 속명 '디오스피로스(Diospyros)'는 주피터의 신(神)인 '디오스'와 곡물을 의미하는 '피로스'의 합성어다. '신의 식물'을 뜻하는 이 말은 그만큼 맛이 좋다는 뜻이며 감나무의 열매를 강조한 것이다.

   국어 어원을 해석한 책, 동언고략(東言攷略)에 따르면 감나무의 감(甘)은 달다는 뜻이다. 이 같은 해석은 감나무에서 익은 열매, 홍시를 뜻한다. 익지 않은 감의 껍질을 깎아서 말린 것을 곶감이라고 한다.

   감나무는 우리에게 친숙한 나무로 우리나라 집안에서 정원수로 쓰이는 대표적 과수다. 가을에 낙엽이 진 후 남은 열매가 아름답다. 우리에게 단감, 연시, 홍시 그리고 곶감을 선사하였고, 목재도 흰 흑단으로 불리며 유용하게 쓰였다.


   나는 감나무를 쳐다보면 고향의 늦가을 정취와 어릴 적 먹었던 단감과 홍시가 생각난다. 그리고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고향의 시골 풍경이 그리워진다. 겨울이 가기 전, 고향으로 내려가 까치밥이 있을 감나무를 맘껏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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