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를 맞이하여

by 홍만식

"아버지, 칠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평소, 말씀은 못 드렸지만 항상 감사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며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한평생 부족함 없이 좋은 환경에서 잘 살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공부 열심히 하여 훌륭한 변호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평생 효도하며 은혜 갚는 아들이 되도록 할게요.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2024. 4. 27

아들 ㅇㅇ 올림"

손자와 함께

며칠 전, 내 고희 생일에 아들이 건네준 축하 카드에 적힌 글귀다. 나는글을 읽으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 나이가 벌써 칠순이라고 생각하니 축하할 일이지만 동시에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되었다.

직장에 다닐 때엔 생존경쟁 속에서 인생의 본래 의미를 새겨볼 겨를도 없었고, 경제적,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온종일 일에 파묻혀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고희는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의 곡강시에 나오는 '인생 칠십 고래희'에서 유래한 말로 칠십까지 산 사람이 드물었다는 뜻이다.


"인생 칠십은 예로부터 드물었다네

꽃사이로 나비가 분분이 날아들고

잠자리는 물 위를 여유롭게 나는구나

듣자니 좋은 경치는 함께 즐겨야 하니

잠시라도 서로 즐기며 기쁨을 나눠보세"


내가 이 세상에 온 지 칠십 년. 부모님을 비롯, 여러 사람들 덕분에 회갑이 지나 고희를 맞이했다는 실이 가슴이 벅차고 감사하다. 하지만 퇴직 후 일상이 단순한 생활의 연속이고 친구들도 하나둘씩 질병으로 시달리거나 심지어는 저세상으로 떠나가,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에 몰두할 때가 있다. 즉 '인간은 태어났으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라는 명제로 그 해답을 찾는데 갈급하기도 한다.


고희란 말도 죽음을 전제로 한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생이 있으면 죽음도 있는 법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바람 속에 먼지처럼 사그라진다.

그런데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가? 어느 철학자는 인생은 원래 의미와 목적이 없고 그저 살아갈 뿐이라고 했다. 나무가 새봄에 새싹이 돋아나고 가을에 낙엽이 지는 자연의 이치와 같다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주장이 일반적이다. 행복에 대한 가장 인기 있는 정의는 '주관적 안녕감'이라고 한다. 안녕이란 평안하다는 뜻으로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특별한 사건이 없는 편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직장, 건강, 가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가 중요하다. 물론 슬프고 괴로운 사람이 자기 인생에 만족할 리 없고 만족감에는 기쁨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행복이란 만족과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학자들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이다."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삶을 제대로 규정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완전한 답이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죽음의 세계는 인간의 경험 영역, 지각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이기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 산다는 것이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다.

프랑스 사상가,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할 일은 아니지만 죽어가는 과정이 두렵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후회 없이 살았다는 신념이 유지되고 죽음의 과정도 존엄성이 지켜져야 아름다운 마무리가 될 수 있다. 사실 잘 죽어야 하는 것도 하늘의 심판이나 윤회의 과보처럼 아주 중요하다. 죽는 날까지 주위의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고통스럽지 않게 하늘나라로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인 것이다. 하지만 '인명재천'이라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신의 영역이라 여기고 자신의 소원을 절대자인 신에게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여생이 얼마나 남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이 부르면 언제든지 귀천할 수밖에 없는 나이가 되었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날까지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노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꿈이요, 희망이다.

오늘 아침, 집 근처 늘벗공원으로 가보니 그토록 화려하게 피었던 영산홍꽃이 어느새 시들어버렸다.

나는 이제야 꽃이 지는 이유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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