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나의 일기> #7
몇 년 전, 한 건설회사 사내 카페에서 일한 적이 있다. 이름만 들으면 딱 아는 유명한 건설사이기도 했고 규모도 워낙 커서 1층 사내 카페에서 일하는 한낱 카페 직원에 불과했지만 몸집이 큰 회사라 그런지 어딘가 엄격한 분위기였다. 바 안에 있을 때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대화는 거의 불가했고 하더라도 짤막한 몇 마디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속삭이는 수준으로만 주고받았다.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이곳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고 제일 놀라웠던 건 떠들지 말라는 경고도 아니고 이 커다란 회사 건물도 아닌 매니저님이 다른 것 보다 제일 중요하게 외워야 할 게 있다며 나를 데리고 가서 보여준 이 회사의 조직표였다.
카페 창고 겸 사무실로 쓰고 있는 공간의 문 안쪽으로는 이 회사의 조직표가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었다. 고개를 들어 맨 꼭대기에 대표님부터 시작해서 사모님 내외, 대표님의 비서, 고위 임원분들, 주요 직원들 등. 역시나 큰 회사답게 인원수도 만만치 않았다. 들어서 시작한 고개를 아래로 살짝 숙이고서야 전체를 훑을 수 있었다.
나는 그냥.. 카페 일 하러 온 건데.. 레시피도 봐야하는데.. 조직표까지 봐야되는구나... 대기업은 사내카페도 다르구나... 뭘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살짝 읭 스럽다가도 납득은 갔다. 마치 이 굵직한 뼈대들 중 어디 하나라도 잘못되고 부러지면 이 커다란 건물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을 것 같은 위압감도 들었다. 한 명 한 명 증명사진 아래 나란히 붙어있는 이름들. 내 눈에 빨리 익혀야 하는 얼굴들과.. 이름들.... 카페 뒷문을 한가득 채우고 있던 그 조직표를 본 순간 바 안에서 떠들지 않는 건 너무 당연했다. 하루 종일 말 하지 말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따로 경고하지 않아도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사내 카페는 이용 고객 99.9%가 회사분들이어서 평소보다 말과 행동을 신경 쓰고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했다. 무엇보다 이 회사에 대해 그리고 이 회사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건 일절 금지다. 아무리 조용히 말한다고 해도 언제 어디서 누가, 나도 모르는 새에 지나가면서 뭐라도 들을지 모르니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속이 편하다. 말 많고 목소리 큰 사람은 사람은 못 버틸 곳이다.
그렇게 고상한(?) 카페 업무에 적응이 되어갈 때쯤, 하루는 출근하고 너무 배가 고파서 같이 일하는 언니랑 냉장고를 뒤적거리다 전날 남은 스콘을 발견했다. 이 사내카페가 또 눈치 볼 일은 많았지만 좋았던 점은 대기업 카페여서 그랬는지 카페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파는 마카롱이나 스콘, 케이크 등 디저트들뿐만 아니라 커피, 제조음료 재료들도 압구정이나 청담동에서 유명하다는 카페에서 들여왔어서 하나같이 너무 맛있었다. 가끔 생각날 정도. 그래서 매번 마감 때마다 남기를 기다렸다. 그날도 전날 남은 스콘을 하나씩 데우고 커피까지 한 잔씩 세팅했다.
크. 원두가 좋아서 커피향도 좋구나~
점심 전 11시 반에서 12시 사이 이때가 가장 사람이 없을 시간이었고 12시 반 이후 러쉬타임 전에 얼른 해치우려고 우적우적 입안에 스콘을 욱여넣는 그 순간이었다.
뜨든.
별안간 대표님과 눈이 마주쳤다. (?)
그냥 직원도 아니고
이 회사 조직표 꼭대기에서 봤던 바로 그 대표님과.
여기서 일하면서 대표님을 보는 건 손에 꼽는 일이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이렇게 뜬금없는 시간에, 제일 조용할 때, 그리고 스콘을 무식하게 입 속으로 욱여넣을 때! 대표님과 눈이 마주치다니! 악!
입 안에 한가득인 것도 모질라 심지어 손에도 스콘이 들려있었다. ㅇ_ㅇ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왜 하필 대표님 전용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면서 먹고 있었을까. 역시 긴장감 없이 살면 언젠가 일을 낸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릿속엔 왜 조직표가 떠올랐을까. 이름도 무섭다 조직표라니.
대표님과 밀접한 관련은 없는 카페 직원이지만 마치 업무 시간에 몰래 딴짓하다 딱 걸린 저 윗층에서 일하는 사무직 직원이 된듯 무언가 대단히 큰 잘못을 저질러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나는 사무직 직원이 아니었다.
멀리서 걸어오시며
스콘을 허버허버 먹는 날 발견한 대표님은
"밥 못 먹었어요~?" 하시며
따수운 한마디와 함께 인자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러곤 마저 더 먹으라는 듯 고갯짓까지 해주셨다.
그 옆에 비서도 같이 웃었다. 젠장!
비서분 키크고 잘 생겼었는데. (?)
너무 당황해서 어버버만 했다. '안녕하세요' 한마디라도 하면 입안에 있는 퍼석한 스콘이 푹- 하고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얼떨결에 머쓱한 양떼 웃음소리만 실컷 내면서 고개를 푹 숙여 급하게 인사를 했다. 대표님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비서와 함께 금방 사라지셨다. 대표님을 마주친 그 짧은 순간 나는 머릿속으로 조직표를 떠올리며 이 큰 회사 사내카페에서 먹을 거나 축내면서 (맞음ㅠ) 추접스럽게 스콘이나 우적우적 먹는 (이것도 맞아ㅠ) 무식한 직원이라고 안 좋은 이미지로 찍히면 어쩌지, 잔소리 들으려나, 잘리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매우 당황했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대표님은 마음이 태평양같은 너그러운 분이었다.
하긴.
스콘 하나에 쪼잔하게 나올 분이 아니잖아 !
난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이 조직이 그 조직도 아니고 !
지금 근무시간 아닌가?!
뭘 먹고 있는 거야! 당장 뱉어!
그거 그거. 압구정에서 유명한 스콘 아니야!?
그게 얼만 줄 알아?!!
뭐 이런 시나리오라도 생각했는지;
스콘 하나 하나 아껴서 세운 회사가 아닐 텐데.
아닌가, 혹시 모른다.
밥 못 먹었냐는 말은
“밥 못 먹었어요~?*^^*?” 가 아니라
“얼씨구. 밥도 안 먹었어요~~?” 였나?
아니면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웃음기 싹 사라지고 옆에 비서분에게
저 친구 당장 정리하게.
라고 하셨을까? 그건 확실히 아니다. 해고 통보를 받진 않았으니. 아무튼 대표님 좋은 분이셨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제야 나는 맘 놓고 나머지 스콘을 천천히 씹어먹었다. 맛있었다.
어느 날은 대표님의 막내딸을 본 적이 있다. 조직표 상단에서 봤던 그 얼굴이었다. 마르고 큰 키에 상의는 트위드 재킷을 걸쳤고 하의는 살짝 핏 되는 검은 슬랙스, 화장기 없는 자연스러운 얼굴에 검은 벨벳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그 순간에만 회사 안으로 바람이 사악 불어왔는지 내 눈에만 그래 보인 건지 여리여리함에 잘 어울리던 긴 생머리는 한껏 찰랑거려 반질거리다 못해 반짝일 정도였다. 영양을 얼마나 준 걸까 그 반짝이던 머릿결은 내 몸뚱이보다 더 건강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냥 대표님 가족이라고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고급스러울 수가 있을까. ‘샤넬을 인간화한 모습’ 이런 말이 저런 사람을 놓고 하는 말인가?! 금수저 집안이라 고급져 보이는 걸까? 원래 고급지게 생긴 얼굴인데 태어나보니 금수저였던 걸까? 신기하게 눈이 떼지지가 않았다.
대표님의 사모님도 남달랐다. 막내딸이 사모님의 유전자를 쏙 물려받은 듯 여리여리하고 큰 키에 언뜻보면 그냥 40대 중반으로도 보일 것 같은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한 피부였고 얼굴은 주먹만한데다가 굵직하게 들어간 웨이브는 사모님의 짧은 머리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집 여성분들의 치트키인지 사모님도 항상 머리띠를 하고 다니셨다. 어느날은 검은색 머리띠, 어느날은 핑크색 머리띠. 다 잘 어울리셨다. 사모님은 종종 카페로 오셔서 말차 프라푸치노에 말차 아이스크림까지 추가해서 드셨다. 말차를 많이 좋아하셨는지 이 회사에 이 카페를 기획할 때 말차 메뉴는 사모님께서 특별히 스타벅스의 말차 프라푸치노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고 싶어서 이집 저집 말차 재료를 들이셨다고 한다.
사모님은 내가 사내카페에 들어오기 전 다른 카페에서 알바할 때 마주쳤던 아주머니들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모든 아주머니가 그렇진 않았지만 이곳 사모님의 말은 항상 차분했고 느긋히 사람을 대할 줄 아셨다. 내세우거나 목소리가 커지거나 급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생활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그저 고급 고급 분위기만 풍기는 전형적인(?) 사모님의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이 회사 사람들을 바 안에서 보는 게 전부이긴 했지만 사람은 서로 몇 마디 나눠보면 어느정도 알 수 있다. 더구나 사모님은 카페에 가장 자주 오셨고 우리와 소통을 가장 많이 하셨던 분이다. 그리고 아줌마의 편견을 조금은 깰 수 있게 해준 분이었다. 이렇게 차분한 아줌마도 있구나 하고 생각의 틈을 조금 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와중에 왜 또 드라마 나의아저씨 속 이지안의 대사가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돈 많은 사람들은 착하기 쉬워.
이 대사가 피해의식에 찌들어 있는 참 삐뚤어진 생각인 것 같다가도 가만 보면 맞는 말인. 애써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들추는 그런 대사다. 돈이 많고 적고에 따라 사람의 태도가 달라진다는게 참 받아들이기 어딘가 불편하면서도 그 말은 틀렸다고 딱 잘라 말 할 수는 없는 것같다. 없는 사람들이 더 한다는 말, 있는 사람은 착하기 쉽다는 말. 사내카페에서 일하는 동안 그 안에 사람들을 대하면서 바깥에 다른 카페에서 일 할 때랑은 또 다른 생각들을 많이 해볼 수 있었다.
회사 안에 있는 카페였어서 그런지 소통도 깔끔했고 많은 분들이 먼저 좋은 매너를 보여주셨었다. 사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과 이용하는 고객은 오래 소통할 일이 없지만 이 사내카페에서는 스몰토크가 종종 오가곤 했다. 나도 그 순간이 즐겁다고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먼저 웃으면서 칭찬을 건네주시던 고위 임원분들도 계셨고 긴머리에서 단발로 자르고 출근했을 땐 알아봐주시고 잘 어울린다고 유쾌하게 칭찬해주던 직원분들도 계셨었다. 긴 기간 일하지는 못했지만 가끔은 다시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근무 첫날 봤던 조직표에 쫄 필요가 없었다. 못 외웠다고 혼나지도 않았고 잘 외웠는지 검사 받는 시간도 없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그 사내 카페를 생각하면 늘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대기업 대표님이라고 호랑이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과 대표님의 사모님이라고 그저 고상하기만 하지 않았다는 것, 항상 친절하고 밝게 대해주던 회사 직원 분들 그리고 그 회사의 구내 식당이 끝내주게 맛있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