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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봄 Sep 20. 2024

안녕 이은비

1)생일파티 2)옷을 물려받았다 3)60원 4)애증의 그림 5)개명

1) 생일파티


    내 생일이 다가오던 초등학생 시절 어느 날,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 같이 맛있는 거 잔뜩 먹는 그런 생일 파티를 해보고 싶다고 쭈뼛쭈뼛 엄마한테 말했었다. 준비해 줄 테니 친구들을 불러오라고 하셨다.


    11월 30일 내 생일날. 학교 끝나고 친구들 네다섯 명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굉장히 들뜬 기분으로 친구들을 리드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 도착하니 부엌에서 엄마가 요리를 하고 계셨다. 왠지 어깨가 으쓱했다.


    치킨, 피자, 엄마가 만든 떡볶이, 김밥, 케이크.. 펼쳐놓은 작은 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올려진 맛있는 음식들. 세 가족이 살기 딱이었던 아담한 집에 어린 초등학생 몇 명이 들어오니 바글바글했다. 생일상을 안방으로 옮겨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내가 원하던 행복한 생일을 보냈다.




    서른이 넘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생일파티가 마냥 좋기만 한 기억은 아닌 것 같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린아이 다운 생일파티를 원한 거였지만 왜인지 그때의 나를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다. 그때 엄마나이는 고작 30대 초반이었고 혼자서 나와 남동생을 키웠다. 내 생일인 그날도 출근했어야 하는 날인데 엄마는 내가 바라던 대로 생일파티를 준비해 주셨다. 안방에 모여 생일상에 둘러앉아 생일파티를 하고 있을 때 엄마는 벽에 기대앉아 미소 지으며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생 딸아이의 생일날 부엌에서 분주하게 음식을 준비하던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눈치 없이 그런 생일파티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딸이 조금은 밉진 않았을까? 더 해줄 수 없는 마음에 슬펐을까? 햇빛도 잘 들지 않던 반지하 집에 친구들을 우글우글 데려왔을 때 조금 창피한 마음도 있었을까? 30대 초반인 지금에야 그때 그 시절 엄마의 마음들이 문득 궁금하다.






2) 옷을 물려받았다.


    어릴 때 집 형편상 입고 싶은 옷을 막 살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다녔던 교회에 집사님께서 한 두 달마다 한 박스 가득 옷을 주셨었다. 그 집사님네 반주자 언니는 부잣집에 외동딸이었고 피아노를 전공해서 그런지 손가락도 가느다랗고 하얗고 야리야리한 데다가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였고 아무튼 나와는 여러 가지로 많이 다른 모습의 언니였다.


    초딩 때 교회 친구들이랑 같이 언니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나는 사람 사는 집이 이렇게 넓을 수도 있구나 하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오버 조금 보태서 언니 방 크기가 거의 우리 집 전체 크기였다. 화장실도 너무 멀어서 가다가 지리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드는 집이었다. 쨍하고 적나라한 형광등 불빛이 아니라 은은하게 주황빛을 내는 따듯한 조명이 이 넓은 집을 감쌌고 그 조명이 대리석 바닥을 더 반짝반짝 빛나게 했다. 그 집엔 예쁜 푸들 한 마리도 살고 있었다. 개팔자 상팔자였다. 아무튼 엄청 넓고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집이었다.


    나한테 옷을 몇 박스 씩 주고도 언니 집 드레스룸엔 옷이 넘쳐났다. 이래서 일요일마다 언니를 봤을 때 매번 옷이 바뀌었던 거구나. 그때는 내가 그 언니를 부러워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언니에게서 몇 박스 씩 옷을 받을 때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수치심 같은 걸 느껴본 적은 없으니 아마 언니를 막 질투하진 않았던 거 같다. 그저 오늘 받은 이 박스엔 어떤 옷들이 담겨 있을까? 하는 기대감만 있었을 뿐이다.




    언니가 물려준 것들 중에 잘 신고 다녔던 운동화가 하나 있었다. 그 신발 바깥 부분엔 작은 은색 큐빅들이 박혀있었고 하얀 끈이 가지런히 매듭지어진 얇은 캔버스 운동화였다. 나는 왜인지 그 신발이 되게 고급스러워 보였다. 발레슈즈같이 예쁜 연분홍색이었는데 그 신발을 신으면 괜히 좀 고상해진 기분도 들었다. 너무 얇아서 겨울에는 발이 많이 시렸는데도 꾸역꾸역 그것만 신었다. 너무 자주 신어서 나중에는 찢어지고 터져서 어쩔 수 없이 버렸다. 물려받은 옷이 한두 개가 아닌데 그 신발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나중에 알바를 하기 시작하면서 월급을 받는 족족 옷을 사 입었다. 어릴 때 입고 싶었던 옷 못 사 입어서 한 맺힌 사람처럼 쇼핑을 정말 정말 많이 했다. 한번 입었던 옷은 또 입으려면 2주는 지나야 입거나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쇼핑을 더 더 열심히 많이 했다. 옷, 신발, 가방, 액세서리 등등 겉치장에 열과 성의를 쏟았다.


    20대 초 중반에 쇼핑을 미친 듯이 한 결과 집에는 옷이 흘러넘쳤다. 나중에 세어보니 청바지 30여 장, 신발도 30여 켤레 정도 됐다. 어릴 때 부잣집 언니네서 본 드레스룸 같았다. 그럼에도 쇼핑은 멈추지 않았다. 있는데 또 사고 또 사고 처음 쇼핑하는 사람처럼 또 사고 또 사고…. 옷에 깔려 죽지 않은 게 다행이다. 20대 때는 옷이며 신발이며 최대한 많이 갖고 싶었고 그래야 뭔가 마음이 편안하고 넉넉했다. 매번 새로운 옷을 입는 게 너무 행복했다. 버리기도 아까워했고 누굴 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30대가 되어서야 그런 욕심이 조금씩 버려지기 시작했다. 늘 새로운 옷을 걸치고 나가야 뭐 좀 되는 사람 같았던 그런 생각이 어느 순간 싹 사라졌다. 차근차근 정리를 했다. 진작 버렸어야 했던 옷들도 언젠가 또 입을 수 있다며 썩혀둔 것만 해도 몇 박스가 나왔다. 있었는지도 몰랐던 옷들, 몇 번 입지도 않고 처박아둔 멀쩡한 옷들도 너무너무 많았다. 몇 박스씩 정리를 하면서 물려받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 집 정말 어려웠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집사님께 그리고 언니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게 참 다행이다. 그랬다면 그때 기억이 그저 힘들었고 불행했던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을까.








3) 60원


    초등학교 1학년 1학기까지 인천 부평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다. 걸어서 등교하기엔 초딩에게 너무 먼 거리라 아침마다 항상 엄마랑 같이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나 혼자 버스 타는 게 영 불안했는지 엄마는 매번 기사님께 ‘얘 부평남초등학교 앞에서 꼭 내려주세요~!’ 부탁을 하셨고 버스에 올라타면 나는 기사님과 제일 가까운 맨 앞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부탁은 했지만 혹시나 기사님이 까먹을 수도 있다는 불안한 마음으로 가는 내내 '나 여기 있어요' 하는 눈빛으로 기사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다르면 기사님께서 ‘여기서 내리면 돼~’ 해주신다. 그럼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쫄래쫄래 앞문으로 내렸다. 마을버스를 개인 버스처럼 타고 다녔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체육수업이 끝나고 사건이 하나 터졌다. 99년도 그때 당시 마을버스 요금은 60원이었는데 어떤 남자애가 자기 주머니에 40원밖에 없다고 누가 훔쳐갔냐며 교실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다. 난데없는 난리통에 나도 혹시 몰라 주머니를 뒤적여보니 웬걸 20원 밖에 없었다. 체육시간에 너무 열심히 뛰어서 운동장에 떨궜나? 나가서 그 넓은 운동장을 일일이 살필 수도 없고 어쩌지? 결국 교실이 발칵 뒤집어졌다. 몇십 원이지만 버스요금을 잃어버리는 건 초등학생에게 너무 큰일이었다.


    난리 난 교실 분위기를 잠재우고 선생님께서 급히 중재에 나섰다. 근데 좀 이상했다. 내가 그 40원만 남은 남자애의 나머지 20원을 훔쳐간 도둑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그 자식도 갑자기 나보고 내놓으란 식으로 나왔다. 벙쪄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니 소심해서 못했다. 교실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범인인 것처럼. 나도 잃어버린 사람인데 나머지 20원마저 뺏겼다.


    그날은 집에 걸어갔다. 20년도 더 된 이때의 일을 기억하는 이유는 아마 억울해서가 아닐까. 내가 아무리 소심하기 짝이 없었어도 그렇지 너네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이것들아. 여기에 다 써놨으니까 반성하고 살아라. 어쩐지 인천만 떠올리면 좋은 기억이 없어. 내 20원..








4) 애증의 그림


    나는 그림을 잘 그린다. 그림뿐만이 아니라 만들기, 펜글씨, POP 예쁜 글씨 등 어쨌든 손으로 하는 건 다 잘했다. 반에서 ‘그림 잘 그리는 친구’ 하면 항상 나였고 납세의 의무를 주제로 한 글짓기로 상 받으러 국세청도 가보고 각종 표어, 포스터 대회가 있으면 무조건 참가해 최우수상부터해서 장려상까지 박박 긁어모았다. 각 반에서 그림 좀 그린다 하는 친구들은 방과 후에 남아서 교실 뒤 게시판 꾸미기를 했었는데 그것도 항상 내가 도맡아서 했었다.


    그 덕에 제일 자주 들었던 말은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 ‘웹툰 작가 해봐’, ‘내 얼굴 그려줘’…. 덕분에 초상화 지겹게 그렸다. 심지어는 경찰서에서 몽타주 그려주는 알바를 해보라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근데 아직까지도 눈코입 그리는 게 제일 어렵다는 게 아이러니다.




    초등학생 때 장래희망이 화가였다. 어릴 땐 그냥 그림 잘 그리면 화가, 노래 잘하면 가수, 말 많고 웃기면 개그맨 등 특기에 따라 나도 당연히 그림 그리는 일을 하겠구나 했고 주변에서도 으레 얘는 그쪽으로 먹고살겠거니 하는 시선이 있었다. 나랑 그림은 절대 떼려야 뗄 수 없는 건 줄 알았다.


    고3 때 미대 가고 싶다는 꿈을 잠깐 가져봤지만 돈이 많이 든다는 말에 바로 접었었다. ‘돈이 드는 일’이라면 애초에 발을 담가 볼 생각조차 안 했다. 어릴 땐 단순히 잘한다는 칭찬이 좋아서 그림 그리는 게 좋았고 30대가 된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언젠가 내게 그림 그리는 게 좋으냐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함을 느꼈을 때 그때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하는 거랑 좋아하는 거.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오히려 막 표현해 낸 그림에 매력을 느꼈다. 뭔가 대충 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끌리는 그런 그림들이 더 좋다. 강박증처럼 그림 그릴 때 나는 깨끗한 선, 깨끗한 색칠에 예민했다. 그렇다고 들인 정성에 비해 딱히 맘에 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냥 ‘잘’ 그린 거에 만족했다. 내가 뭘 그리고 싶어 하는지 진짜 그림을 그릴 때 좋고 재밌는지. 그런 고민이 생긴 순간 그림 그리는 게 답답해졌다. 그냥 그림 그리는 것 자체가 좋았다면 이런 고민도 안 하지 않았을까? 그림과 나는 애증의 관계인 것 같다.









5) 개명


    20대 후반에 개명을 했다. 사람들을 만나서 통성명을 할 때마다 늘 따르는 질문들이 있었다. ‘한자 이름이에요? 한글이에요?’, ‘은비까비 만화 그 은비?’, ‘누가 지어줬어요?’, ‘동생은 까비? 금비? 동비?’ 등.


    개명 전 이름엔 별 뜻이 없다. 한자도 아니고 어떤 의미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동생 이름이 까비 금비 동비는 더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가 지어줬는지부터 해서 어디 성씨인지 자기 이름의 한자어가 뭔지 친절히 설명해 준다. 나는 내 이름에 길게 덧붙일 설명이 따로 없으니 다른 사람들이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의 뜻을 이야기해 줄 때 그냥 그렇구나 듣고만 있었다.


    이름에 별생각 없이 살다가 20대 후반 즈음 직장에서 만난 어떤 언니가 내 이름의 의미를 듣고 엄청 충격을 받았었다. 개명 전 이름은 친아빠가 지어준 이름인데 그냥 은비 까비 만화를 보고 지었다고 엄마가 그랬다. 그래서 사람들이 물어볼 때마다 이렇게 지어진 이름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었는데 이 언니의 반응을 보고 그때 처음으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도대체 자기 자식 이름을 그렇게 대충 짓는 아빠가 어딨냐며, 언니가 대신 화를 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랬다. 자기 자식이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어떤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지 그런 마음을 담아 이런저런 한자를 넣어가며 뜻을 만들어주고 제일 예쁜, 제일 좋은 이름으로 지어주는데 나는 고작 은비 까비 만화 주인공의 이름이라니. 그것도 친아빠가 지어줬다는 게 갑자기 너무 화가 났다. 자식한테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는 게 이렇게 내 이름에서부터 티가 났던 거였구나.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 이름으로 여태 살아왔던 나 자신한테도 좀 짜증이 났다.


    그런 마음이 들자마자 나는 이참에 친아빠의 흔적을 아예 지워버리고자 개명을 했다. 더 이상 내 이름이 만화에서 대충 가져왔다고, 친아빠가 지어줬다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





‘안녕, 이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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