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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상념 (1)

大器晚成….

by 메모한줄

oo군 oo면 oo리. 내가 태어난 집 주소이다. 한마디로 시골이다. 읍내에 나가는 군내버스는 하루에 4번. 그런데 고향의 위치가 읍내보다 도시에 가까워서인지 한 시간에 한대 꼴로 도시로 운행하는 시내버스가 있었으니 그리 깡(?)촌은 아니었다 싶다.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그 시골 동네에서 졸업하고 인근 도회지로 고등학교 유학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80년대 중후반 17살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객지에서 이후 평생을 이어지고 있다. 3년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고향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집으로 가는 길은 도회지 외곽을 조금 지나면 논 사이에 쭉 이어진 길이었다. 고1일 때 비포장 도로였었고 고2부터 포장도로였던 것으로 기억이 나고, 특히 도로포장 공사를 한 이후에 도로 양쪽 주변에 뿌린 코스모스가 가을이 되면 끝없이 이어지는 꽃 길을 만들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가수 나훈아의 “고향역”을 지금도 좋아한다. 노래 가사의 어머님은 막내아들 공부시키신다고 그 시골에서 고생하신 홀어머님 바로 나의 어머님이셨다.


3년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대학입학 시험을 보러 올라간다. 그 시절은 학력고사시절이라 대학을 정하고 해당 대학에서 시험을 치렀다. 이른바 선지원 후시험. 해당 대학에 1지망, 2지망 이렇게 2개의 전공을 지원할 수 있었고, 전기 시험과는 별개로 후기 모집 대학이 있어서 전기에 불합격하면 후기에라도 다시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고3 학력고사에는 1지망이 아닌 2지망 합격. 지금 같으면 in Seoul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일단 지방의 도시에서 벗어나 서울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무슨 배짱에서인지 과감히(?) 재수생이 된다. 그리고 또 삼수생이 된다. 그 시절 주말마다 시골집에 내려가기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남대문경찰서 뒷길로 남산 도서관에 가곤 했다. 도시락 하나를 준비하고 점심과 저녁엔 각각 컵라면 하나를 사서 함께 먹었다. 저녁을 먹고 내려다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보며 “나는 언제쯤 저 많은 불빛 속에 나의 불빛을 밝힐 수 있을까?” 생각했었고 왠지 그 생각은 나를 응원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우울하게 했었는지 이후 성인이 되어 연애를 하고 데이트를 하면서도 여자 친구와 남산에는 가지 않았다..


그 시절 자주 듣던 말… 大器晚成

일반적으로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진다 “ 는 의미로 쓰인다(네이버 사전). 당시 나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 말인가? ㅎㅎ


세월이 흘러 어느덧 50대가 훌쩍 넘은 어느 날. 노자의 도덕경을 처음으로 읽던 중 41장에서 大器晚成이라는 구절을 만났고, 위에서 언급된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뜻과 다른 해석들이 있음을 알았다. 전후 문맥을 보면


—-전략—-

大方無隅

大器晚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후략—


晚은 無나 希나 無처럼 부정사로 해석하여야 전후 문맥이 맞아 전체적인 조화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니(도덕경, 최진석 p333, 노자가 옳았다. 김용옥 p339) 최진석 교수는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고, 김용옥 교수는 “큰 그릇은 이루어진 것 같지 않고”라고 해석한다. (일반 독자인 나로서는 이런 해석에 대한 견해를 소개만 할 뿐 어떤 것이 옳고 어떤 해석이 옳지 않은지는 글쎄…….)


다만 혼자서 잠시 생각해 본다

크다는 것이 무엇일까? 네모가 있는데 모서리가 없다? 도대체 얼마나 크면, 있긴 한데 못 느끼는 것인가? 모서리가 없다면 네모가 아니지 않은가? 아니 모서리가 없다면 네모니, 세모니 하는 것 자체가 다 의미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완성이란 무엇일까? 어떤 이루어짐의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작을 포함한 이루어짐까지의 끊임없는 과정 전체를 말하는 것일까? 어찌 되었건 세상사에 완성이란게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릇이 상상할 수 도 없을 만큼 커서 지금 이 순간도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라면 역설적이게도 완성되지 않은 것처럼 보일 것이고 그러니 만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 아닐까?


내 어린 시절 동기들과 비교해 보면 나는 대학도 늦게 들어가고(이러 저런 여건으로 대학을 진학하지 못한 친구들도 많았지만), 직장 생활도 늦게 시작했고, 결혼도 늦었고, 아이도 늦게 태어나고….. 삶의 중요한 시작이 비교적 늦은 것 같다.

만일 시작과 마무리. 그 변화의 온 과정이 완성이라면 이왕 늦은 거 나는 그 완성을 좀 더 느리게, 여유 있게 맞이하고 싶다. ㅎㅎ. 욕심이 많은 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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