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사랑이라는 관성이 나를 망치고 있을 때
사랑을 시작할 때 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미덕은 '인내'와 '이해'였다. 상대의 결점을 품어주고, 조금 더 기다려주는 것이 성숙한 사랑의 증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인내가 나를 갉아먹는 줄도 모르고 계속된다면, 그것은 성숙함일까 아니면 스스로를 향한 방관일까.
한때 나는 약속 장소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일에 익숙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연락, 온기 없는 대화 속에서도 나는 우리가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라는 명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상대의 무심함을 '원래 그런 성격'이라는 상자로 포장해 치워 두고,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서늘한 감각이 올 때마다 나는 더 큰 사랑으로 그 틈을 메우려 애썼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지보다, 내가 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2인용 자전거에서 상대가 페달을 밟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자전거가 쓰러지는 것이 두려워 혼자 두 배의 힘을 쏟았다. 하지만 관계는 혼자서 굴리는 자전거가 아니다. 한 명의 희생으로 겨우 굴러가는 바퀴는 결국 가장 약한 곳부터 부서지기 마련이다.
이별의 순간이 왔을 때 내가 느낀 가장 큰 감정은 배신감이 아니라 미안함이었다. 상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미안함 말이다. 나는 상대에게 좋은 연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느라, 정작 내가 이 관계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한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몸이 안 좋아지는 것을 알면서도 습관처럼 연기를 들이마시는 담배처럼, 나는 익숙한 불행에 중독되어 나를 방치하고 있었다. "왜 더 빨리 끊지 못했을까"라는 질문의 끝에는 항상 "내가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서 있었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상대를 위하는 마음'이라고 정의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출발점은 '나를 위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내가 무너진 채로 쌓아 올린 관계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안의 빛이 꺼져가는 것을 보고만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관성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관계의 무게 때문에 숨이 가쁜 이들에게 묻고 싶다. 내가 지금 지키려고 애쓰는 그 풍경 속에서, 나는 진정으로 웃고 있는가? 혹시 사랑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나 자신의 행복을 뒤로 미루고 있지는 않은가?
나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은 때때로 가장 익숙한 손을 놓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상대를 향한 원망이 아니라, 나를 다시 살리기 위한 가장 숭고한 선택이다. 이별이 허무한 이유는 내가 쏟은 공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돌보지 못한 채 보낸 시간들에 대한 뒤늦은 회한 때문이다. 이제는 그 에너지를 나에게로 돌려야 할 때다. 나를 해치는 중독에서 벗어나, 비로소 나 자신과 화해하는 건강한 숨을 쉬어야 한다.
나의 연애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작고 초라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면 기억해야 한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