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주권자의 귀환 - 촛불에서 응원봉까지
▌"제주 4.3은 이념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됐다는 사실, 그 하나면 충분합니다" - 노무현 대통령, 2003년 10월 31일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
2025년 현재 제주도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평화공원을 방문해요. 그곳에서 3만여 명의 희생자 이름이 새겨진 위령탑을 보며 숙연해지죠. 하지만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추모는 상상할 수 없었어요.
"4.3"이라는 숫자 두 개조차 입에 올리기 어려웠거든요.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습니다. 수만 명이 죽었는데도 말이에요.
빨갱이 폭동이라고 불렸고, 희생자 가족들은 연좌제에 시달렸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제대로 추모받지도 못했어요. 진실은 7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침묵당한 역사가 다시 빛을 보게 됐을까요? 그리고 제주 4.3의 진상규명은 한국의 과거사 청산과 민주주의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200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제주 4.3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의문사, 고문 등 권력이 저지른 폭력의 진실이 하나둘 드러났어요. 이는 단순한 역사 복원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었어요.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제주도 곳곳에서 무장봉기가 시작됐어요. 한라산을 중심으로 350여 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 사무실을 습격했습니다.
이 사건의 발단은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광장에서 3.1절 기념식이 열렸는데, 기마경찰이 아이를 다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항의하던 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해 6명이 사망했어요.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3월 10일부터 총파업이 시작됐고, 관공서와 학교가 모두 문을 닫았어요. 166개 기관에서 41,211명이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제주도 전체가 마비된 거였어요.
하지만 정부와 경찰의 대응은 강경했습니다. 파업 주동자들을 대거 체포하고,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단체를 제주에 파견했어요. 이들은 제주도민들을 무차별 탄압했습니다.
1948년 들어 상황이 더 악화됐어요.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는 제주도민들과 정부 사이의 갈등이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4월 3일 무장봉기가 터진 거였어요.
무장봉기가 시작되자 이승만 정부는 강력한 토벌작전에 나섰어요. 1948년 10월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해안선에서 5km 이상 내륙지역 주민들은 모두 '폭도'로 간주해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는 사실상 제주도민 전체를 적으로 규정한 것이었어요.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내려오면 빨갱이로 몰려 죽고, 산에 있어도 토벌대에게 죽는 상황이었거든요.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진행된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가 불타고 사라졌어요. 북촌, 곤을동, 가시리, 표선면 등에서 대규모 주민 학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의 목소리] "중산간 지대는 통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라" - 1948년 10월 송요찬 제9연대장 명령
가장 참혹했던 건 북촌리 학살사건이었어요. 1949년 1월 17일, 군인들이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을 마을 공터에 집합시킨 후 기관총으로 집단 사살했습니다.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가리지 않았어요.
이런 학살이 제주도 전역에서 벌어졌습니다.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지만, 당시 제주도 인구 28만 명 중 3만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돼요. 인구의 10%가 넘는 숫자였습니다.
4.3이 끝난 후 제주도에는 긴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어요. 정부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으로 규정했고, 어떤 다른 해석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은 더 큰 고통을 겪었어요. 연좌제로 인해 취업, 진학, 공직 진출 등 모든 면에서 차별받았습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이 평생을 따라다녔어요.
무덤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었습니다. 4.3 희생자의 무덤을 쓰면 '빨갱이 무덤'이라며 파헤쳐졌거든요. 많은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했어요. 제대로 된 장례도, 추모도 할 수 없었습니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잠깐 진상조사가 시도됐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중단됐어요.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 정권까지 30년간 4.3은 완전한 금기였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제주에서도 4.3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싹텄어요. 하지만 여전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4.3을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렸거든요.
1987년 민주화 이후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언론과 학계에서 4.3에 대한 연구가 조심스럽게 시작됐습니다.
198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이 발표되면서 4.3이 문학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어요. 1989년에는 제주 MBC가 4.3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항이 컸어요. 보수 언론과 우익단체들은 "빨갱이 미화"라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4.3을 다룬 영화나 소설, 다큐멘터리는 늘 논란의 중심에 섰어요.
1990년대 들어 제주도민들의 목소리가 더 커졌습니다. 4.3 유족회가 결성됐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활동이 본격화됐어요. 매년 4월 3일마다 추념식을 열며 세상에 4.3의 진실을 알렸습니다.
1995년에는 4.3 연구소가 설립돼 본격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됐어요. 생존자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관련 자료를 발굴하며, 학술적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2000년은 4.3 진상규명에 있어 결정적인 해였어요. 1월 12일 국회에서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습니다.
이 법은 여야 합의로 통과됐어요. 보수적인 한나라당까지도 찬성한 겁니다. 50년 넘게 금기였던 4.3이 드디어 국가적 차원에서 조사받게 된 거였어요.
특별법에 따라 4.3 위원회가 구성됐고, 본격적인 진상조사가 시작됐습니다. 15명의 위원 중 8명은 시민사회 인사로 구성돼 독립성을 확보했어요.
4.3 위원회는 5년간 치밀한 조사를 진행했어요. 생존자 1,500여 명을 면담하고, 미군정과 한국 정부의 문서 10만여 점을 분석했습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집단매장지에서 유해도 발굴했어요.
2003년 10월 15일, 마침내 4.3 조사보고서가 국회에 제출됐습니다. 총 18권 1만 2천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어요. 4.3의 전모가 공식적으로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2003년 10월 31일, 제주 평화공원에서 역사적인 순간이 벌어졌어요. 노무현 대통령이 4.3 희생자들에게 공식 사과한 겁니다.
"국가권력이 집단적인 민간인 희생을 초래하고도 이를 은폐해 왔던 것에 대해 정부를 대표해서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55년 만에 나온 국가의 첫 사과였어요. 유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 순간을 지켜봤습니다. 평생을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속에 살아온 이들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거든요.
▌[당시의 목소리] "아버지, 이제야 억울함이 풀렸습니다. 55년을 기다렸습니다. 이제 편히 잠드십시오" - 2003년 추념식에서 한 유족의 발언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4.3을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라고 명확히 규정했어요. 그리고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유족들에 대한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이후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 작업이 본격화됐어요.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이 지급됐고, 위령제단과 위령비가 건립됐습니다. 무엇보다 '빨갱이'라는 낙인이 공식적으로 벗겨진 거였어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4.3 진상규명은 다시 어려워졌어요. 보수 정부는 4.3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보였고, 추가 조사는 중단됐습니다.
하지만 2014년 새로운 전환점이 찾아왔어요. 4.3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추가진상조사가 시작된 겁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5년간 진행됐어요.
추가조사에서는 이전에 밝혀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드러났습니다. 미군의 4.3 개입, 예비검속과 보도연맹 학살, 토벌대의 조직적 강간 등이 그것이었어요.
특히 여성에 대한 성폭력 실태가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충격적이었습니다. 토벌과정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했지만, 70년간 입을 열지 못했던 거였어요.
2019년 3월 추가진상조사보고서가 발표됐습니다. 기존 보고서보다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어요. 4.3의 진실이 한층 더 명확해진 순간이었습니다.
2018년 3월 21일, 또 하나의 역사적 순간이 찾아왔어요. 문재인 대통령이 4월 3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다고 발표한 겁니다.
70년 전 '폭동'이라고 불렸던 날이 이제 국가가 기리는 날이 됐어요. 이는 4.3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같은 해 4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해 추념사를 했어요. "제주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이제 4.3은 더 이상 금기가 아니에요. 전국의 학교에서 4.3을 가르치고,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집니다. 제주 평화공원에는 전국에서 온 학생들과 시민들이 끊이지 않아요.
하지만 여전히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이뤄지지 않았고, 일부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진정한 화해와 상생을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제주 4.3의 진상규명은 한국 사회 전체의 과거사 청산에 중요한 의미를 가져요. 국가권력이 저지른 폭력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선례가 됐거든요.
4.3 이후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부림사건, 인혁당 사건 등 수많은 과거사가 재조명됐어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도 설치돼 체계적인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아니었어요. 권력의 폭력을 견제하고, 인권을 보장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해야 미래의 재발을 막을 수 있거든요.
또한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확산됐어요. 국가나 가해자의 논리가 아닌, 피해자와 유족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됐습니다. 이는 인권 의식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었어요.
오늘날 제주도는 '평화와 인권의 섬'으로 불려요. 4.3의 비극을 딛고 평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상징적 공간이 된 거죠.
제주 평화공원은 매년 수십만 명이 찾는 평화 교육의 현장이에요. 한국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4.3의 역사를 배우러 옵니다. 국가폭력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동시에 깨달을 수 있는 곳이거든요.
제주도는 또한 평화 연구와 교육의 중심지가 되고 있어요. 제주평화연구원, 다크투어리즘 프로그램 등을 통해 4.3의 교훈을 현재와 미래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4.3의 경험은 분단 극복과 평화 통일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줘요. 이념 갈등이 빚어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대화와 화해가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거든요.
2025년 현재 4.3은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일부가 됐어요. 더 이상 금기도, 터부도 아닙니다. 오히려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자산이 됐죠.
하지만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들이 있어요. 일부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유해 발굴도 계속 진행 중입니다. 무엇보다 4.3의 교훈을 어떻게 현재와 미래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어요.
중요한 건 4.3을 과거의 일로만 여기지 않는 것이에요. 국가권력의 폭력, 이념 갈등, 인권 침해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계속 기억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또한 4.3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들을 세계와 나눠야 해요. 과거사 청산, 피해자 중심 접근, 평화와 화해의 가치 등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전 세계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들입니다.
70년간 침묵당했던 역사가 빛을 보기까지의 길고 험난한 여정. 그 과정에서 보여준 유족들의 끈질긴 투쟁과 시민사회의 연대, 그리고 국가의 참회와 반성. 이 모든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소중한 자산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4장 20화: "응원봉 현상의 정치학: 새로운 세대의 정치 참여와 감정 민주주의" - K-pop 팬덤에서 시작된 응원봉 문화가 어떻게 정치적 표현 수단이 됐는지, 그리고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새로운 정치 참여 방식을 분석합니다.
[용어 해설]
제주 4.3: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시작된 무장봉기와 그에 따른 진압과정에서 3만여 명의 주민이 희생된 사건. 70년간 금기시됐으나 2000년 특별법 제정으로 진상규명이 시작됐다.
과거사 청산: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인권침해나 불법행위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과정. 민주주의 발전의 필수 요소로 여겨진다.
연좌제: 가족이나 친족 중 정치적 처벌을 받은 사람이 있을 때 다른 가족 구성원도 불이익을 받는 제도. 4.3 유족들이 오랫동안 시달린 차별의 근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