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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쫓는 물고기들: 불교로 보는 문학의 풍경

제1부 새로운 렌즈 – 하늘·먹이·물고기

by 한시을

4회: 괴로움 - 욕망과 먹이의 불일치


왜 먹이를 얻어도 만족하지 못할까


상상해 보세요. 오랫동안 갖고 싶던 명품 가방을 드디어 샀습니다. 구매 순간의 짜릿함, SNS에 올렸을 때의 뿌듯함. 하지만 며칠 지나면 어떤가요? 그 감동은 사라지고, 또 다른 새로운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취업 준비생이 드디어 원하던 회사에 합격했습니다. 기쁨은 잠깐, 곧 다른 동료들과의 비교가 시작됩니다. 연봉, 직급, 성과... 끝없는 비교 속에서 또 다른 괴로움이 시작되죠.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먹이를 얻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펄떡이는데, 막상 얻고 나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부처님이 2,500년 전에 발견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라는 것.


괴로움의 네 가지 얼굴


부처님은 괴로움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것을 만나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오온성고(五蘊盛苦): 몸과 마음이 변하는 괴로움


문학 작품들은 이 네 가지 괴로움 중 하나 이상을 다룹니다. 아니, 모든 인간의 이야기가 이 네 가지 안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춘향과 몽룡의 이별은 애별리고입니다. 변학도를 만나야 하는 것은 원증회고입니다. 신분제 때문에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은 구부득고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변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오온성고입니다.


욕망과 현실의 간극


괴로움의 본질은 단순합니다. 욕망과 현실이 안 맞는 것입니다.


우리의 6개 감각기관(안이비설신의)이 6개 먹이(색성향미촉법)와 접촉하면서 욕망이 생깁니다. 이 욕망이 뇌와 마음의 골에 깊이 각인되어 집착이 됩니다. 문제는 현실이 이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세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 원하는 먹이를 아예 얻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조선시대 기생의 딸 춘향이 양반과의 자유로운 사랑을 원했지만 신분제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구부득고입니다.


둘째, 먹이를 얻었지만 기대와 다른 경우입니다. 이광수의《무정》에서 이형식이 추구한 신교육과 근대화는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얻었지만 원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셋째, 먹이를 얻었는데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원하는 경우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바로 이런 구조입니다.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옵니다. 끝없는 욕망의 연쇄가 계속됩니다.


하늘이 만드는 괴로움


하늘은 단순히 먹이를 던져주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어떤 먹이는 허락하고 어떤 먹이는 금지합니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일제강점기 하늘을 보세요. "황국신민이 되라", "일본 통치체제를 받아들이라"는 먹이를 던지면서 동시에 "조선어를 쓰지 마라", "독립운동을 하지 마라"는 금지를 가했습니다.


이 먹이를 받아먹은 친일파들도 괴로웠습니다. 양심의 괴로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먹이를 거부한 독립투사들은 더욱 괴로웠습니다. 투옥, 고문, 죽음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독재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정희는 경제성장과 반체제 금지라는 먹이를 던졌습니다. 경제적 풍요를 얻는 대신 정치적 자유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전두환은 3S(영화, 스포츠, 섹스)와 체제인정이라는 먹이를 던졌습니다. 오락거리는 넘쳐나지만 민주주의는 억압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응하는 물고기들도, 저항하는 물고기들도 모두 괴로웠습니다. 다만 그 괴로움의 종류가 달랐을 뿐입니다.


현대의 괴로움: 선택의 과잉


신자유주의 하늘 아래에서는 또 다른 형태의 괴로움이 나타납니다. 금지가 아니라 과잉입니다.


너무 많은 선택지가 주어집니다. 수백 개의 채널, 수천 개의 앱, 수만 개의 제품...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괴롭습니다. 선택하고 나면 "더 나은 선택이 있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조남주의《82년생 김지영》을 보세요. 김지영이 괴로운 이유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경력을 쌓을 것인가, 육아에 집중할 것인가. 둘 다 하라는 사회의 요구 앞에서 무엇을 선택해도 괴롭습니다. 경력을 선택하면 나쁜 엄마가 되는 것 같고, 육아를 선택하면 무능한 여성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한강의《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이런 과잉 선택 자체를 거부합니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모든 먹이를 거부하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삶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이 선택도 괴로움으로 이어집니다. 주변 사람들의 이해받지 못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갇히게 되죠.


물고기들 사이의 괴로움


개인의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고기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같은 먹이를 놓고 경쟁할 때 생기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얻고 누군가는 못 얻습니다. 얻은 사람은 잃을까 봐 괴롭고, 못 얻은 사람은 박탈감에 괴롭습니다.


서로 다른 먹이를 추구할 때도 괴로움이 생깁니다. 남한체제(자본주의+민주주의)를 선호하는 물고기들과 북한체제(사회주의+공산주의)를 추구하는 물고기들 사이의 갈등이 그 예입니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명호가 괴로워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어느 쪽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의 갈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그룹, 환경보호를 우선시하는 그룹과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그룹... 서로 다른 '법' 욕망을 가진 물고기들 사이의 충돌에서 집단적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무상(無常): 영원한 것은 없다


괴로움의 더 깊은 원인은 무상(無常)입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입니다.


하늘도 변하고, 먹이도 변하고, 강물도 변합니다. 조선의 하늘이 무너지고 일제강점의 하늘이 왔고, 그것도 사라지고 분단의 하늘이 왔습니다. 독재의 하늘도 무너지고 민주화의 하늘이 왔습니다.


먹이도 계속 변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급제가 최고의 먹이였지만 지금은 아무도 원하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좋은 먹이로 보였던 신교육도 해방 후에는 친일의 흔적으로 비판받았습니다.


물고기 자신도 변합니다. 몸도 늙고, 생각도 변하고, 관계도 변합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엄밀히 말하면 다른 존재입니다.


이 무상함 때문에 설령 원하는 먹이를 얻어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얻는 순간 이미 변하기 시작하니까요. 명품 가방의 감동이 며칠 못 가는 이유, 승진의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무상 때문입니다.


집착: 괴로움을 키우는 것


부처님이 발견한 또 다른 통찰은 집착이 괴로움을 증폭시킨다는 것입니다.


6개 감각기관이 6개 먹이와 접촉하면서 생긴 경험이 뇌와 마음의 골에 각인됩니다. 이것이 '의(意)'를 중심으로 하나의 거대한 욕망 체계를 만들고, 결국 집착이 됩니다. 그리고 이 집착을 '나'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나는 성공해야 해", "나는 인정받아야 해", "나는 사랑받아야 해"... 이런 생각들이 바로 집착입니다. 이 집착이 강할수록 괴로움도 커집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 남편을 보세요. 그는 "정상적인 아내"에 대한 집착이 있었습니다. 아내가 고기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고, 자신의 욕구를 채워주기를 원했습니다. 이 집착이 영혜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둘 다 괴로워졌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남편"이라는 집착이 있었습니다. 자신은 가사를 분담하고 아내를 배려하는 좋은 남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김지영이 원하는 것은 그런 배려가 아니라 근본적인 구조 변화였습니다. 집착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죠.


문학은 왜 괴로움을 다루는가


이제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 모든 문학이 괴로움을 다루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괴로움이 없으면 서사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변화도, 갈등도, 성장도 없습니다.


춘향이 변학도의 유혹을 받아들였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서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춘향이 거부하고 괴로워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명호가 남한이나 북한 중 하나를 선택했다면? 《광장》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선택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문학이 됩니다.


영혜가 평범한 아내로 살았다면? 《채식주의자》는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극단으로 치닫는 괴로움이 있기에 문학이 되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아름다움


역설적이게도 괴로움은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문학이 괴로움을 기록하지만 동시에 승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춘향의 괴로움은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신분제라는 부당한 하늘에 맞선 인간 존엄의 승리입니다. 그 괴로움을 통해 춘향은 기생의 딸에서 정의의 상징으로 변합니다.


명호의 괴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실패가 아니라, 불완전한 두 체제를 모두 꿰뚫어 본 통찰입니다. 그 괴로움을 통해 분단 체제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영혜의 괴로움은 어떨까요? 정신병원에 갇힌 패배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거부한 저항입니다. 극단적 방식이었지만, 그 괴로움을 통해 우리 사회의 억압 구조가 가시화됩니다.


괴로움과 변화


괴로움은 변화의 씨앗이기도 합니다. 개인이 괴로워하면 자신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집단이 괴로워하면 사회를 변화시키려 합니다.


4.19 혁명을 보세요. 이승만 독재에 괴로워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개인의 괴로움이 모여서 집단의 저항이 되었고, 결국 독재의 하늘을 무너뜨렸습니다.


6월 항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두환 독재에 괴로워하던 물고기들의 강물이 거침없이 넘쳐나서 민주화의 하늘을 열었습니다.


현재 신자유주의 하늘 아래서 괴로워하는 물고기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김지영처럼, 영혜처럼, 기존 체제가 주는 먹이를 거부하는 물고기들이 늘어나면 언젠가 강물이 변하고 하늘도 바뀔 것입니다.


문학의 영원성


그렇다면 문학은 왜 영원한가?


하늘은 계속 변하고, 먹이도 계속 변합니다. 하지만 물고기의 욕망 구조는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색성향미촉법이고, 여전히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한국이나 미국이나, 인간은 똑같이 펄떡이고 괴로워합니다. 대상과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그래서 500년 전 춘향의 이야기가 지금도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욕망과 현실의 간극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의 본질은 같기 때문입니다.


문학은 이 영원한 괴로움을 기록하고, 공유하고, 승화시킵니다. 그래서 문학은 영원한 것입니다.


[다음 회 예고] 제2부 5회: "봉건의 하늘 – 《춘향전》과 《홍길동전》" -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문학 작품들을 해제합니다. 조선시대 신분제라는 하늘 아래에서 춘향과 홍길동이 어떤 먹이를 쫓았는지, 그리고 그 괴로움이 어떻게 500년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갖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용어 해설]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라는 불교의 근본 진리. 욕망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오는 괴로움

오온(五蘊):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색(물질), 수(느낌), 상(생각), 행(의지), 식(인식). 이 모두가 끊임없이 변하면서 괴로움을 만들어냄

무상(無常):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불교의 진리. 하늘, 먹이, 물고기 모두 끊임없이 변함

집착: 특정한 욕망이나 대상에 강하게 매달리는 것. 괴로움을 증폭시키는 주요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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