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대신 예배를 선택한 여자들

3장 의례의 정치학

by 한시을

15회 의례 전쟁의 피해자는 누구인가


명절 다음 날, 법원에서

통계청이 발표한 '2024년 혼인·이혼통계'에 따르면, 2024년 연간 이혼 건수는 9만 1,151건이다. 이 숫자를 월별로 쪼개면 흥미로운 패턴이 나타난다. 이혼 신고가 가장 많았던 달은 설 연휴가 포함된 1월로, 월별 비중 8.7%를 기록했다. 5월, 7월과 함께 공동 1위다.

명절이 지나고 법원에 이혼 신청서가 몰린다. 연휴 내내 쌓인 무언가가 결국 폭발한다. 물론 단 하나의 명절이 이혼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그러나 명절은 평소 가려져 있던 갈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촉매가 된다. 그리고 그 갈등의 상당 부분이 의례를 둘러싼 것이다. 제사를 지낼 것인가, 교회에 갈 것인가. 누가 부엌에 서는가, 누가 밥상 앞에 앉는가. 의례가 공동체를 결속시키기는커녕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3장을 통해 우리는 의례가 어떻게 정치가 되었는지를 살펴봤다. 11회에서는 누가 제사를 미신으로, 예배를 신성으로 정의하는지를 물었다. 12회에서는 국가와 종교가 어떻게 의례를 도구로 삼았는지를 추적했다. 13회에서는 데닛의 밈 이론으로 불교·천주교·개신교가 제사를 각각 어떻게 다뤘는지를 분석했다. 14회에서는 명절 전날 교회 기도회가 제사 시간을 어떻게 대체하는지를 보았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이 모든 의례 전쟁에서 피해자는 누구인가?

온라인 커뮤니티에 명절이 끝난 뒤 올라오는 글들이 있다. "이번 추석 너무 힘들었어요. 시댁 제사 지내는 동안 남편이랑 크게 싸웠고, 명절 끝나자마자 친정에 갔는데 어머니한테 하소연하다가 또 울었어요. 즐거워야 할 명절인데 왜 이렇게 허탈하죠?" 이런 글 아래에 댓글들이 달린다. "저도 그래요." "우리도 이번에 크게 싸웠어요." "명절만 지나면 이혼 생각 나요." 명절은 끝났다. 하지만 상처는 남는다.


"명절증후군"이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며느리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신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3년이다. 한국가족관계학회지에 실린 김미동·김해란(2018)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중앙일보 기사에서 한 정신과 교수가 "남편을 따라 귀향해 시부모를 뵙는 것 자체가 핵가족 시대의 며느리들에게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라고 지적하면서 이 개념을 정의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며느리증후군'은 '명절증후군'으로 확장되었고, 이제 며느리뿐 아니라 취업준비생, 수험생, 미혼 청년들까지 명절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하지만 여전히, 명절 스트레스 기사 457건을 분석한 같은 연구에서 아내 관련 기사가 230건, 전체의 50.3%에 달한다. 30년이 지났어도 가장 많이 다치는 것은 아내이고, 며느리다.

'명절증후군'은 세계 어디에도 있다. 미국에는 'holiday blues'가 있고, 일본에는 오봉 스트레스가 있다. 하지만 연구들에 따르면 한국의 명절 스트레스 수준이 서양의 크리스마스 스트레스보다 높다는 결과가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한국의 명절은 단순히 가족이 모이는 날이 아니다. 의례가 집중된 날이다.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준비하고, 어른께 인사하고, 친척이 모인다. 그리고 이 의례의 노동은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다.

듀오라이프컨설팅이 전국 기혼 여성 40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전체 응답자의 58.1%가 "시댁 방문은 어렵고 불편하다"고 답했다. 시댁 방문을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로는 시어머니(41.8%)가 1위였고, 시누이(21.2%)가 뒤를 이었다. 재혼 전문 결혼정보회사 온리-유와 비에나래가 돌싱 남녀 518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여성이 꼽은 명절 최대 스트레스 요인은 '시가 가족과의 만남'(29.3%)이었다. 반면 남성은 '아내와의 일정 조율'(30.5%)이 1위였다. 같은 명절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


갈라진 가족들

35세 A씨 가족은 명절을 세 장소에서 보낸다. 남편은 시댁 제사에, A씨는 교회 예배와 기도회에, 남편의 여동생은 "명절이 너무 힘들어서" 해외여행을 간다. 시어머니는 혼자 제사상 앞에 앉는다. A씨는 그 장면을 상상한다. "시어머니가 불쌍하기도 해요. 근데 그렇다고 제가 제사상 앞에 앉아 있을 수는 없어요. 내가 거기 있으면 또 일만 해야 하니까요.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42세 B씨는 시댁과 완전히 단절됐다. 결혼 초부터 제사 문제로 갈등했고, 남편과 반복적으로 싸웠다. 교회를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자 시어머니가 "교회 때문에 가정이 무너진다"고 말했다. 결국 남편이 양쪽에서 눌리다가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손을 놓았다. B씨는 말한다. "시댁이랑 갈등하려고 교회 간 게 아닌데, 결과적으로 시댁과의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그게 남편한테는 상처였던 것 같아요. 저도요."

47세 C씨의 경우는 반대 방향이다. C씨 자신은 개신교 신자지만, 시댁이 불교 집안이다. 시어머니는 명절마다 절에서 천도재를 지낸다. C씨는 그 자리에 따라간다. "신앙 때문에 힘들기도 해요. 내가 불교 의례에 참여하는 게 맞는 건지. 근데 시어머니가 그게 조상 모시는 거라고 하시니까, 일단 자리는 지켜요." C씨의 남편은 종교가 없다. "남편은 뭐든 상관없다고 해요. 결국 저 혼자 기준을 세워야 해요. 어디까지 따라가고, 어디서 선을 그을지."

38세 D씨는 명절마다 남편과 싸운다. 남편은 시댁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D씨는 교회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느 해 추석, 남편이 말했다. "당신은 내 가족보다 교회가 더 중요한 거야?" D씨가 대답했다. "당신은 내 신앙보다 제사가 더 중요한 거야?" 두 사람은 그날 밤새 싸웠다. D씨는 그 대화를 기억한다. "우리 둘 다 맞는 말을 한 거예요. 근데 동시에 맞으면 싸울 수밖에 없잖아요. 이건 우리 문제가 아니에요. 구조 문제예요."

29세 E씨는 결혼 첫 해 명절을 치른 뒤 시어머니와 한동안 연락이 끊겼다. 교회를 이유로 제사를 거부했고, 시어머니가 "네가 우리 집안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E씨 남편은 "어머니 말씀이 틀리지 않았어. 근데 그렇다고 당신한테 제사 강요하기도 어렵고"라며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E씨는 남편의 태도에 더 상처받았다. "시어머니가 화나는 건 이해해요. 근데 남편이 나 편을 안 들어주는 게 더 힘들었어요. 내가 이 집에서 혼자인 것 같았어요."

55세 F씨는 세 아들을 두었다. 첫째 며느리는 불교, 둘째 며느리는 천주교, 셋째 며느리는 개신교다. 명절마다 F씨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다 모이면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셋째 며느리가 절을 못 해요. 근데 뭐라고 하면 종교 탄압이 되고. 그러니까 셋째만 제사 때 옆방에 있어요. 그 아이도 불편하고, 저도 불편하고. 이게 가족이에요, 아니에요?"


지갈라타스의 이론: 의례가 공동체를 파괴할 때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는 『Ritual』(2022)에서 의례가 어떻게 공동체를 결속시키는지를 설명한다. 그의 핵심 논지는 명확하다. 의례는 집단 결속을 만들고, 정체성을 부여하고, 불안을 완화한다. 의례 없이 인간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어렵다.

하지만 지갈라타스는 동시에 의례의 경계 기능을 강조한다. 의례는 참여자와 비참여자를 나눈다. 어디에 있느냐가 어느 공동체에 속하는지를 규정한다. 제사에 참여하면 가족 의례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교회 예배에 참여하면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두 공동체가 같은 시간을 요구할 때, 사람은 하나를 선택함으로써 다른 하나에서 배제된다.

지갈라타스는 또한 비용 신호(costly signaling)를 이야기한다. 의례에 참여하기 위해 치르는 비용이 클수록, 그 의례에 대한 헌신이 증명되고 공동체 결속이 강화된다. 그런데 이 이론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다. 그 비용이 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의 비용은 크다. 며느리들은 전날부터 음식을 준비하고, 당일 새벽부터 상을 차리고, 제사가 끝난 뒤 설거지를 한다. 노동 강도가 상당하다. 하지만 지갈라타스의 이론으로 보면, 이 비용이 시댁 공동체 안에서 충분히 인정받는다면 결속이 만들어진다. 문제는, 많은 며느리들이 이 비용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고생한다는 말은 있어도,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경험이 부족하다.

반면 교회 공동체는 이것을 잘 한다. 명절에도 예배에 나온 성도를 기억하고 인정한다. 비용이 인정받는다. 며느리들이 교회 쪽을 선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 더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인정을 받는다.

지갈라타스는 이 역설을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의례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의례가 일부 구성원에게 일방적 비용을 부과하면서 인정은 하지 않을 때, 그 의례는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분열을 만든다. 제사라는 의례가 가족 공동체를 결속시키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현재의 방식으로 운영될 때 오히려 가족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도구가 된다. 이것이 역설이다.


소통 단절: 말하지 못하는 것들

의례 전쟁의 피해는 관계의 단절에서도 나타난다. 며느리는 교회 간다고 했고, 시어머니는 불쾌했고, 남편은 끼어 있고,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한 며느리가 썼다. "시어머니한테 솔직하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제사가 힘들어요. 저도 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조상님은 제 조상님도 아닌데 왜 제가 중심이 되어야 해요.' 이런 말 못해요. 했다가는 불효며느리 됩니다. 그래서 교회 핑계 대는 거예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으니까." 이 고백은 의례 전쟁의 본질을 건드린다. 전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아무도 진짜 이야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다. 한 시어머니가 썼다. "며느리가 교회 간다고 제사에 안 오면, 저도 섭섭해요. 근데 뭐라고 하기가 어려워요. '교회 가지 마'라고 하면 종교 탄압 되고. 그냥 참아요. 근데 그게 쌓이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냥 셋이서 제사 지내요. 며느리는 없는 사람 취급하면서." 며느리가 말하지 못한다. 시어머니도 말하지 못한다. 남편은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른다. 가족이 같은 공간에 있어도 진짜 소통은 일어나지 않는다.

가톨릭뉴스가 2009년 보도한 사회학자 은기수 교수의 연구는 이 소통 단절의 구조적 배경을 보여준다. 연구에 따르면 사위-처부모의 종교일치도보다 며느리-시부모의 종교일치도가 훨씬 높게 나타난다. 은 교수는 이것을 가부장적 한국 사회에서 "며느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의 하나는 가족의 종교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동일한 종교를 지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사위는 처가의 종교와 달라도 괜찮다. 며느리는 시댁의 종교와 같아야 한다는 암묵적 기대가 존재한다. 이 기대를 어겼을 때 오는 갈등이, 의례 전쟁의 실체다.

48세 G씨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제사를 어떻게 할지 처음으로 남편과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시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말을 못 했어요. 당신이 주관하시는 제사에 우리가 뭐라고 할 수 없잖아요. 돌아가시고 나서야 남편한테 말했어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까? 나는 교회 다니는데.' 그때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했어요.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나도 사실 제사 형식이 의미 있는지 모르겠어. 우리 식으로 바꿔볼까?' 왜 그 말을 진작 못 했을까요. 시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G씨의 이야기는 의례 전쟁이 얼마나 많은 소통을 막아왔는지를 보여준다. 살아 계실 때는 말하지 못했다. 죽고 나서야 대화가 시작됐다. 의례가 가족을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진짜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공동체 파괴의 역설

의례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의례 전쟁은 공동체를 파괴한다. 이것이 역설이다.

명절은 원래 가족이 모이는 날이었다. 조상을 함께 기억하고, 음식을 나누고, 세대를 연결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명절은 많은 가족에게 갈등의 날이 됐다. 누가 부엌에 설 것인가, 누가 교회에 갈 것인가, 제사를 지낼 것인가 예배를 드릴 것인가. 의례를 둘러싼 싸움이 명절의 본래 의미를 잠식한다.

데닛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의례 전쟁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개신교는 며느리들에게 제사 거부의 명분을 제공하면서 신자를 확보했다. 시댁은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며느리의 노동을 당연시했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손해를 봤다. 명절마다 갈등하고, 명절이 지나면 법원에 이혼 신청서가 쌓인다. 의례를 지키려다 의례의 목적인 가족 결속을 잃은 것이다.

지갈라타스는 의례가 어떻게 공동체 결속을 만드는지를 연구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의례가 배타성을 만들기도 한다고 경고한다. 특정 의례에 참여함으로써 다른 공동체에서는 배제된다. 한 가정 안에서 두 개의 의례 공동체가 충돌할 때, 의례는 결속이 아니라 분열의 도구가 된다.

이 역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코로나 시기다. 나무위키가 인용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코로나로 가족·친척들과 만나지 않게 되자 성인 10명 중 8명이 명절 스트레스가 줄었다고 답했다. 가족을 만나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줄었다. 명절이 가족을 결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주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의례가 공동체 결속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한 글이 이 역설을 간결하게 표현한다. "명절이 없어지면 더 자주 볼 것 같아요. 명절이 있으니까 명절에만 억지로 보고, 명절이 끝나면 다시 안 보는 거예요. 명절이 오히려 가족을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의례가 공동체를 결속시킨다는 지갈라타스의 이론이 여기서 뒤집힌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의례는 결속이 아니라 분열을 만든다.


진짜 피해자들

의례 전쟁의 피해자는 며느리만이 아니다.

시어머니도 피해자다. 그녀는 자신이 며느리였을 때 의례를 감당했다. 이제 제사를 이끌 시대가 됐는데, 며느리가 교회 간다고 없다. 시어머니는 외롭다. 나쁜 시어머니가 아니다. 자신이 물려받은 의례 방식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려 했는데, 그 전달이 막혀버린 것이다.

남편도 피해자다. 그는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 있다. 아내 편을 들면 불효자가 되고, 어머니 편을 들면 아내와의 관계가 망가진다. 어느 쪽이든 상처가 생긴다. 많은 남편들이 D씨처럼 이렇게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포기가 부부 관계에 균열을 만든다.

자녀도 피해자다. 명절마다 싸우는 부모를 보며 자란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는가? 명절은 갈등의 날이라는 것, 제사는 싸움의 원인이라는 것, 의례는 의미가 아니라 부담이라는 것.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명절을 피하려 할 것이다.

가족 공동체가 가장 큰 피해자다. 명절이 지나면 가족이 가까워져야 한다. 함께 조상을 기억하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눴으니. 하지만 의례 전쟁을 치른 가족은 명절이 지나면 더 멀어진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쌓인다. 다음 명절이 두려워진다.

온라인 커뮤니티에 한 며느리가 썼다. "솔직히 이제는 명절에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제사? 예배? 그냥 가족이랑 같이 밥 먹고 얘기하면 안 되나요? 왜 이게 이렇게 복잡해요? 명절이 이렇게 힘든 거 맞아요?" 맞지 않다. 명절은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의례 전쟁이 명절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의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3장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 여기서 다시 나온다. 의례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11회에서 우리는 제사와 예배를 우상숭배와 신성으로 나누는 이중 잣대를 보았다. 그 정의는 권력을 가진 자의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현대 한국에서는 개신교와 시댁이 의례를 정의한다.

12회에서 우리는 국가가 의례를 도구로 삼은 역사를 봤다. 신사참배와 조찬기도회, 의례는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이 됐다.

13회에서 데닛의 밈 이론은 불교와 천주교가 제사와 공존하며 상리공생자가 됐고, 개신교는 기생자에 가까운 관계가 됐음을 보였다.

14회에서 우리는 명절 전날 교회 기도회가 제사 시간을 대체하는 타이밍의 정치학을 보았다. 교회와 며느리는 각자의 이유로 이 구조에서 이득을 얻었고, 가족이 손해를 봤다.

그리고 15회에서 우리는 피해자를 확인했다. 며느리, 시어머니, 남편, 자녀, 가족 공동체. 의례 전쟁의 피해자는 의례를 통해 결속되어야 할 공동체 그 자체다.

지갈라타스는 의례가 공동체를 결속시킨다고 했다. 그 말은 맞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의례가 공동체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일부에게만 비용을 부과하고, 일부에게만 의미를 주는 의례는 공동체를 결속시키지 않는다. 분열시킨다.

제사가 며느리를 포함한 가족 모두를 위한 의례로 변하지 않는 한, 의례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교회가 가족 분열의 도구가 아니라 가족 공동체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변하지 않는 한, 명절은 전쟁터로 남는다.

이것이 3장 의례의 정치학이 도달한 결론이다. 의례는 정치가 됐다. 그리고 정치가 된 의례는 공동체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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