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의례의 분기점
명절 전날 밤의 풍경이 달라졌다.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둔 저녁,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짧은 글이 올라왔다. "우리 집은 올해부터 제사 안 하기로 했어. 아버지가 먼저 얘기 꺼내셨음. 홀가분하다."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 절반 이상이 비슷한 경험을 나눴다. "우리도 3년 전부터 안 해",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자연스럽게 없어졌어", "형이 이민 가서 주관할 사람이 없음". 나머지 절반도 "솔직히 우리도 곧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분위기였다. 공감 버튼을 누른 사람이 3천 명을 넘었다.
이것은 특정 가정의 이야기가 아니다. 온라인에는 매년 명절 전후로 비슷한 글들이 넘쳐난다. 어느 해부터인가 제사를 그만뒀다는 이야기, 어떻게 그만두었는지를 묻고 답하는 이야기들이다. 형식은 달라도 내용은 닮아있다. 제사를 지탱하던 어떤 조건이 사라지면서 의례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제사가 사라지고 있다는 징조는 이미 수치로 확인된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2023년 만 20세 이상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제례 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보면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응답이 62.2%였다. 열 명 중 여섯 명이 아직 제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뒤따르는 수치가 더 의미심장하다.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는 응답이 55.9%였다. 지금은 지내고 있지만 계속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이 안에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계산해도, 현재의 62.2%는 조만간 대폭 줄어든다.
명절 차례를 기준으로 보면 변화의 속도는 더 가파르다. 한국갤럽의 추적 조사를 보면 유교식 차례를 지내는 비율이 2006년까지 80%에 육박했다. 그것이 10년 후인 2014년에는 71%로 떨어졌다. 그리고 최근 여러 조사들은 40% 내외로 집계한다. 20년 사이에 절반 가까이 감소한 셈이다.
더 직접적인 수치도 있다. 사후에 자신의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사람이 남성 16.7%, 여성은 2.4%에 불과했다. 2019년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조합원 65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다. 제사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이미 이렇게 적다면, 다음 세대가 제사를 지낼 이유는 무엇인가.
제사는 지금 사라지고 있다. 그것이 이 글이 출발하는 전제다.
왜 지금인가 — 붕괴의 구조를 읽다
제사가 수백 년을 지속해 온 의례라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속도는 빠르다. 왜 하필 지금인가. 감정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제사를 가능하게 했던 구조적 조건들이 동시에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에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모일 수 있는 가족'이다. 제사는 본질적으로 집합 의례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 모여,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함께 절을 올리고, 함께 음식을 나눈다. 집합이 없으면 제사는 형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둘째는 '의례를 주관할 사람'이다. 전통 제사에서 그 역할은 장남, 혹은 종손이 맡았다. 셋째는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공간'이다. 제사는 주로 시골의 본가, 혹은 장남의 집에서 치러졌다. 제사상이 놓일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했다.
지금 이 세 가지가 모두 흔들리고 있다.
첫 번째 조건의 붕괴 — 모일 가족이 없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1인가구는 전체 가구의 36.1%인 804만 5천 가구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 통계로 보는 1인가구' 발표 수치다. 세 가구 중 하나 이상이 혼자 산다는 뜻이다. 2050년에는 이 비율이 40%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 수치가 제사와 무슨 관련인가. 직접적이다. 1인가구는 가족 집합의 출발점 자체가 달라진 가구다. 결혼을 하지 않았거나, 이혼했거나, 배우자와 사별했거나, 혹은 처음부터 혼자 살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시댁 제사'나 '친정 제사'는 개념 자체가 다르게 작동한다.
1인가구의 연령대별 분포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70세 이상이 19.1%로 가장 높고, 29세 이하가 18.6%로 바로 뒤를 잇는다. 노인 1인가구와 청년 1인가구가 동시에 급증하고 있다는 뜻이다. 노인 1인가구는 제사를 주관할 체력과 의지가 줄어들고 있는 세대다. 청년 1인가구는 제사를 지낼 이유를 찾지 못하는 세대다. 이 둘이 맞물리면 어떻게 되는가. 제사를 요구하는 사람과 제사를 수행할 사람이 동시에 줄어든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글이 이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30대 후반의 한 남성이 이런 글을 올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제사를 내가 모셔야 하는데, 나는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고, 동생은 캐나다에 있어. 명절에 고향 내려가면 나 혼자 빈집에서 제사 지내는 거잖아. 그게 말이 되나." 댓글에는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나도 그래서 결국 안 하기로 했다", "혼자 지내는 제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또 다른 사람이 올린 글도 있다. 40대 초반 여성이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시아버지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셔. 시댁 제사를 누가 지내야 하는지 남편이랑 한 달째 이야기 중인데 결론이 안 나. 시동생은 미혼이고 우리는 맞벌이인데 매년 제사 준비를 내가 다 해야 하는 건지. 그냥 제사 없애고 싶은데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다." 이 글에 달린 댓글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썼다. "꺼내는 게 맞아. 지금 가족 구조가 제사를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면 말하는 게 맞아." 그 댓글에 다시 수백 개의 공감이 달렸다.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다. 가족 해체라는 구조적 변화가 만들어낸 결과다. 대가족이 함께 살거나 가까이 살던 시대에 제사는 자연스럽게 집합의 계기였다. 이제 가족은 도시 곳곳에, 혹은 다른 나라에 흩어져 있다. 제사를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려면 일부러 모여야 하는 시대가 됐다. 그 비용과 수고가 점점 커지면서, 사람들은 계산한다. 이 수고를 들일 만한 이유가 충분한가.
두 번째 조건의 붕괴 — 장남이 사라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제사의 주관자는 장남이었다. 더 정확히는 적장자, 즉 종손이었다. 조선시대 주자가례에 기반한 제례에서 제사는 장남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장남 집에서 제사를 지내고, 장남이 제주(祭主)가 되어 의례를 이끌었다. 그 장남을 위해 며느리들이 음식을 준비했고, 친척들이 모였다.
그런데 이 구조의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저출산이 장남 개념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2명이었다. 여성 한 명이 평생 낳는 아이가 채 한 명도 안 된다는 뜻이다. 자녀가 하나이거나 아예 없는 가구가 늘고 있다. 아이가 하나라면 그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선택할 수 없다. 딸 하나인 가정에서 전통적 의미의 장남 제사를 논할 수 없다. 아이가 없는 가정에서 제사를 이을 다음 세대 자체가 없다.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장남이 있더라도, 그 장남이 제사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앞서 인용한 조사에서 사후에 자신의 제사를 지냈으면 좋겠다는 남성이 16.7%였다. 열 명의 아버지 중 여덟 명 이상이 "내 제사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제사를 받을 의향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면, 제사를 지낼 의무감도 줄어든다. 요구가 없는 곳에 공급이 유지되기 어렵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 60대 초반 남성이 "나는 자식들한테 제사 부담 주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내 기일에 맛있는 거 먹으러 가라고 했다"는 글을 올렸다. 댓글에는 "부모님 세대에서 이런 말씀 먼저 해주시면 정말 감사한 것", "우리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엄마가 반대하심" 같은 반응들이 이어졌다. 제사는 이제 자식이 원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요구하기 때문에 지내는 것이 되어가고 있고, 그 요구마저 줄어들고 있다.
세 번째 조건의 붕괴 — 유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사는 공간과 결부된 의례다. 묘가 있는 고향, 신주(神主)가 모셔진 사당, 혹은 위패가 놓인 장남의 집. 죽은 자는 특정 장소에 고정되어 있었고, 산 자는 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명절에 시골 고향 내려가는 문화는 이 구조에서 나왔다.
그러나 2023년 기준 한국의 화장률은 92.9%에 이른다. 보건복지부의 화장통계 결과다. 2000년 이전까지만 해도 40%에도 미치지 못하던 수치가 20여 년 사이에 두 배를 훌쩍 넘겼다. 이제 사망자 열 명 중 아홉 명 이상이 화장을 선택한다.
화장은 제사 공간의 전제를 근본적으로 바꾼다. 유골은 매장된 시신과 달리 이동이 가능하다. 봉안당에 모셔지기도 하고, 수목장이나 산골(散骨)을 선택하기도 한다. 자연장이 선택지로 자리잡으면서, '죽은 자가 머무는 고정된 장소'라는 개념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제 고인의 유골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제사를 어디서 지내야 하는지, 혹은 지내야 하기는 한 것인지를 가족들이 처음부터 의논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제사의 형식은 있지만 그것을 수행할 장소가 불분명해졌다.
고향 집이 없어지는 것도 이 변화를 가속화한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한 지 반세기가 지났다. 2023년 현재 도시 지역 인구 비율은 전체의 92.1%다. 국토교통부·한국국토정보공사의 도시계획현황 통계 수치다. 명절에 귀성하는 '고향'이 사라지고 있다. 부모가 이미 도시에 살고 있고, 조부모도 도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제삿날 몇 시간 운전해서 내려가야 하는 시골 본가가 없어졌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40대 여성이 쓴 글이 이 상황을 잘 보여준다. "시아버님 돌아가시고 봉안당에 모셨는데, 제삿날 봉안당에 가서 절 하고 오면 되는 건지, 아니면 집에서 제사상 차려야 하는 건지. 남편도 모르고 시어머니도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하심. 결국 식당에서 밥 먹고 봉안당 들렀다 왔는데, 이게 제사인지 뭔지." 이 글에 달린 댓글에도 비슷한 혼란이 쏟아졌다. 형식을 잃어버린 의례가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화장이 일반화되면서 제사의 물리적 기반이 해체되고 있다. 고정된 장소, 고정된 날짜, 고정된 형식. 이 세 가지 고정성이 제사의 틀이었는데, 유골이 이동할 수 있게 되면서 그 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데닛의 이론으로 보다 —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3장에서 우리는 제사와 예배의 의례 전쟁을 데닛의 밈 이론으로 분석했다. 데닛은 『Breaking the Spell』(2006)에서 종교를 밈으로 분석하며 핵심 질문을 던진다. Cui Bono — 누가 이득을 보는가. 이 질문은 종교를 넘어 의례 전반에 적용된다. 의례도 숙주에게 이득을 제공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데닛이 여기서 다시 유효해진다.
전통적 제사는 누구에게 이득이었는가. 가문의 유지를 원했던 조선의 지배층에게 이득이었다. 부계 혈통을 확인하고 재산 상속의 근거를 만드는 장치로 제사는 기능했다. 장남 중심의 권위 구조를 재생산하는 데 제사만큼 효과적인 의례가 없었다. 며느리들에게는? 3장에서 이미 분석했다. 과도한 노동, 소속감의 부재, 보상 없는 헌신. 제사는 며느리들에게 이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제사 소멸은 누구에게 이득인가. 며느리들에게 이득이다. 이미 여성들은 수십 년에 걸쳐 제사를 거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교회라는 출구를 찾았고, 핵가족화를 이유로 내세웠으며, 명절 증후군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을 공론화했다. 그 집합적 선택이 제사를 약화시켰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제사의 소멸이 반드시 의례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는다. 데닛의 밈 이론을 의례에 확장하면, 의례 역시 숙주에게 이득을 줄 수 없으면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것에 자리를 넘겨준다. 제사가 사라지는 자리를 무엇이 채우는가. 그것이 4장 전체의 질문이 된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의례의 공백이 생겨나고 있다. 이 공백을 누가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탐색하기 전에, 공백의 규모를 먼저 직시해야 한다.
제사를 지탱했던 마지막 버팀목
제사가 이토록 오래 유지된 데는 이유가 있다. 쉽게 보이지 않는 이유들이다.
첫째는 '부모의 요구'다. 지금도 제사가 유지되는 집안의 상당수는 노부모가 생존해 있는 경우다.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자녀들이 제사를 지속한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조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유 2위가 '부모님이 지내고 있어서'(27.2%)였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부모가 원하기 때문에 지내는 것이다. 노부모 세대가 사라지면 이 버팀목도 사라진다.
둘째는 '관습적 관성'이다. 제사는 집안의 연례 행사였다. 특별히 지내야 할 이유가 없어도, 특별히 그만둘 계기가 없으면 유지된다. 관성은 강력하다. 사람들은 기존의 행동 방식을 바꾸는 데 에너지가 든다. 제사를 없애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가족 관계를 건드리는 일이고, 그 갈등을 피하기 위해 불만스럽더라도 계속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관성이 깨지는 순간이 온다. 부모가 돌아가거나, 형제자매가 이민을 가거나, 자녀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이런 사건들이 관성을 끊는 계기가 된다. 또 하나의 계기가 최근 들어 눈에 띈다. 코로나19 이후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모임 자체가 불가능했던 시기를 겪으면서 제사를 건너뛰었던 집안들이, 사회가 정상화된 이후에도 다시 시작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강제로 끊겼던 관성이 자연스럽게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코로나19가 제사 소멸을 가속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는 '연결의 기회'다. 제사를 지내는 사람 중 16.6%가 '가족과 교류를 위해서'라고 답했다. 이것은 의미심장한 수치다. 제사 자체가 아니라, 제사가 만들어내는 가족 모임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의례가 아니라 연결의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연결도 대안이 생기면 제사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 가지 버팀목이 차례로 무너지면서 제사는 지금 소멸의 궤적을 그리고 있다.
[현재의 데이터 — 제사 소멸의 지형도]
수치를 한 번 정리해 보자.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답한 성인 비율: 62.2%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고 답한 성인 비율: 55.9%
명절 차례를 지내는 비율(2014년 기준): 71%
명절 차례를 지내는 비율(최근): 40% 내외
사후 자신의 제사를 원하는 남성 비율: 16.7%
사후 자신의 제사를 원하는 여성 비율: 2.4%
2023년 화장률: 92.9%
2024년 1인가구 비율: 전체 가구의 36.1%
2023년 합계출산율: 0.72명
이 숫자들은 각각 다른 기관의 조사에서 나왔지만,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제사를 지탱하던 조건들이 동시에 붕괴하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가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화장률의 경우 2000년 이전 40% 미만에서 2023년 92.9%까지, 불과 20여 년 사이에 2배 이상 상승했다. 1인가구 비율도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저출산은 10년 넘게 가속화되고 있다. 사회 변화의 속도와 의례 변화의 속도가 맞물리면서, 제사는 그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
숫자 뒤에 있는 사람들
통계 너머에 실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제사 소멸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가 보인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60대 여성이 이런 글을 남겼다. "40년 동안 제사상 차렸다. 명절마다 전날부터 준비했고, 며느리 역할 한다고 허리 망가졌다. 이제 내 아들이 결혼해서 며느리가 생겼는데, 며느리한테 그걸 시키기 싫다. 그래서 올해부터 제사 없애자고 내가 먼저 얘기했다. 나이 들어서 깨달았다. 제사가 가족을 이어주는 게 아니라 며느리를 갈아먹는 구조였다는 걸." 수천 명이 이 글에 공감 버튼을 눌렀다.
또 다른 30대 남성의 글이다. "아버지가 올해 돌아가셨는데, 제사를 모셔야 하나. 나는 비혼이고, 동생은 미혼이고, 어머니는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아버지 기일에 우리 셋이 식당 가서 아버지 좋아하시던 음식 먹고, 사진 보며 이야기 나눴다. 이게 제사인지 모르겠지만, 이게 더 아버지한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에도 공감하는 댓글이 많았다.
두 이야기에서 공통된 무언가가 보인다. 제사라는 형식을 버리지만,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은 버리지 않는다. 형식이 사라지고 있지만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는 남아있다. 이것이 제사 소멸 이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세 번째 이야기도 있다. 50대 초반 여성이 썼다. "시부모님 제사 20년 동안 내가 다 모셨다. 올해부터 안 하기로 했는데 남편이 의외로 반대 안 했다. 남편도 사실 부담이었던 것 같다. 근데 요즘 가끔 생각이 든다. 시부모님이 어떤 분들이었는지를 손자들이 아예 모르겠구나 싶어서. 제사 지낼 때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는데. 제사 자체가 싫었지, 그 이야기들이 싫은 게 아니었는데." 이 여성이 잃어버린 것은 제사가 아니라, 제사가 만들어낸 이야기의 시간이었다. 형식을 버렸더니 그 형식이 담고 있던 다른 무언가도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이것이 제사 소멸의 역설이다. 제사 자체는 부담이었지만, 제사가 만들어내던 것들 — 이야기, 기억, 연결의 시간 — 은 여전히 필요하다. 형식과 기능이 함께 사라질 때 생기는 공백이다.
제사가 제공했던 것 — 지갈라타스의 렌즈로 보다
인지인류학자 디미트리스 지갈라타스는 의례가 인간에게 세 가지 핵심 기능을 제공한다고 분석했다. 집단 결속, 정체성 부여, 불안 완화다. 그의 저서 『Ritual』(2022)은 의례가 왜 모든 인류 사회에 존재하는지를 진화적, 인지적 관점에서 풀어낸다.
제사는 이 세 가지 기능을 어느 정도 제공해 왔다. 집단 결속: 제사는 흩어진 가족을 한 자리에 모이게 했다. 정체성 부여: 제사를 통해 우리가 같은 조상의 후손임을 확인했다. 불안 완화: 죽음이라는 불안 앞에서 제사는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연결을 유지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지갈라타스의 분석을 한국 제사에 적용할 때 결정적인 질문이 생긴다. 의례가 이 기능을 참여자 모두에게 고르게 제공하는가. 그렇지 않을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 기능을 제공받는 집단과 비용을 부담하는 집단이 다르면, 의례는 내부 갈등을 만들어낸다. 한국의 전통 제사가 정확히 이 상황이었다. 제사의 기능(결속, 정체성, 불안 완화)은 주로 남성 가부장 중심의 가문이 누렸고, 비용(노동, 시간, 체력)은 며느리들이 감당했다. 이 불균형이 제사를 내부에서 부수어왔다.
지갈라타스의 분석에서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이 있다. 의례의 비용 신호(Costly Signaling) 이론이다. 의례에 높은 비용이 수반될수록,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의 헌신이 더 강하게 입증된다. 힘든 의례일수록 결속력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을 한국의 제사에 적용하면 흥미로운 역설이 생긴다. 제사가 힘들수록 — 즉 며느리들의 노동이 많을수록 — 가부장제적 가문의 결속은 강화된다. 비용을 치르는 쪽과 이익을 보는 쪽이 다른 구조에서, 비용 신호 이론은 착취의 논리로 전환된다. 며느리들의 고통이 가문의 결속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그 착취 구조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비용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그 비용 지불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제사의 소멸은 그 거부의 누적된 결과다.
지갈라타스가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이 있다. 의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의례는 사라지기도 하고, 형태를 바꾸기도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의례가 담당하던 기능 — 연결, 기억, 정체성 — 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의례 없이 살 수 없다. 제사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생겨난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겨나고 있는가.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제사의 소멸은 이미 진행 중이지만, 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형식은 아직 만들어지는 중이다.
소멸의 세 가지 경로
지금 관찰되는 것들을 정리하면, 제사는 세 가지 방향으로 소멸하고 있다.
첫 번째는 조용한 소멸이다. 버팀목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중단되는 경우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형제자매가 멀리 이사하고, 자녀가 결혼하지 않으면서 제사를 이을 사람이 없어지는 방식이다. 이것이 가장 흔한 형태다. 갈등 없이, 선언 없이, 어느 해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제사상이 차려지지 않게 된다.
두 번째는 간소화를 거친 변형이다. 제사를 완전히 없애지는 않지만, 형식을 최소화하는 방향이다. 전통적인 제사상 대신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 몇 가지만 차리거나, 가족이 식당에 모여 식사하는 것으로 대체하거나, 온라인으로 모여 기일을 기리는 방식이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조사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응답자 중 41%가 '간소화하거나 가족 모임 같은 형태로 대체하겠다'고 답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형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계층화를 통한 양극화다. 이것이 4장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대다수의 제사가 조용히 소멸하는 반면, 일부 가문에서는 제사가 오히려 더 공개적이고 더 화려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권력과 자원이 집중된 곳에서는 제사가 다른 기능을 갖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17회에서 더 상세히 다룰 것이다.
빈자리의 시대
제사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는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정직한 대답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그 자리를 채울 다른 의례를 갖지 못하고 있다. 기일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고인을 기억하는 방식이 없다. 흩어진 가족이 모일 계기가 사라졌다. 제사가 불완전하게나마 담당하던 연결과 기억의 기능이 공백이 된 상태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 이 공백을 보여준다. "올해 처음으로 제사 안 지냈다. 솔직히 홀가분하다. 그런데 기일 당일 날 뭔가 이상하게 허전하더라.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혼자 술 한 잔 했다. 이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제사를 버렸지만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은 버리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다. 형식을 잃은 의미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다.
이 공백은 우연이 아니다. 의례가 사라지는 속도에 비해 새로운 의례가 만들어지는 속도가 느릴 때 공백이 생긴다. 지금 한국이 그 시간 안에 있다.
지갈라타스가 말했듯이, 인간은 의례 없이 살 수 없다. 제사는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조상을 기억하고, 가족이 연결되며, 죽음 앞에서 불안을 달래는 인간의 욕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 욕구가 새로운 형식을 찾을 것이다. 찾고 있다.
문제는 그 새로운 형식이 누구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지는가다. 다시, Cui Bono. 누가 이득을 보는가. 이 질문이 제사 소멸 이후의 시대를 이해하는 열쇠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관찰을 추가해야 한다. 제사의 소멸은 모두에게 균등하게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을 주의 깊게 보면, 평범한 가정에서 제사가 사라지는 동안 특정 집단에서는 제사가 오히려 더 큰 규모로, 더 공개적인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역설이 보인다.
데닛의 밈 이론을 의례에 확장하면 이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의례도 숙주에게 이득이 있는 한 살아남는다. 이득이 없어지면 도태된다. 그런데 숙주의 자원과 목적이 다르면, 같은 의례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다. 자원이 없는 숙주에게 의례가 부담이 되면 소멸한다. 자원이 풍부하고 목적이 다른 숙주에게 의례가 여전히 유용하다면 강화된다. 의례의 분기점이란 이것이다. 같은 이름의 제사가 계층에 따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뉘어 가는 지점.
대다수에게 제사는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게 제사는 다른 무언가로 변모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지가 17회의 이야기다. 제사가 사라지는 시대에, 스펙터클이 되는 제사. 의례의 귀족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