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탄 지국 아이들

by 박노빈


스탄 지국 아이들


박 노 빈


우리 이웃 학교는 한 반에 한국인이 한 명이거나 전혀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안산 분교


한국 아이보다 더 한국 아이 같은 동북 삼성 출신의 여자 아이


코로나 시국에도 마스크 쓰고 모둠을 고집해야 하는 과학실에서 가장 돋보이던


나의 열열한 팬


목소리가 기차 화통 만큼 커서 목소리가


개미 소리 만하고 보통 교실의


서너 배는 되는 넓디 넓은 과학실에서 나를 많이 도왔으나,


담임 선생들과 남자애들의 질색 팔색의 눈총을 받아도 당당하더니


방학 때 모국에 다녀오자


갑자기 요조숙녀가 된 아이


아이들이 USSR이라고 모둠 이름을 멋 모르고 지어서 이 민족주의자의 견제를 잔뜩 받은


스탄 지국의 분교


지나는 길에 수줍게 노크하고 사탕 한 개를 쥐어주며 애교가 넘치는 금발의 하얀 피부의 여자 아이


이중 언어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하여 학교를 빛낸 아이


앎의 샘을 찾아 사막을 헤매는 잔뜩 목 마른 사람, 공자의 수제자처럼


맛난 최고의 음식을 마주하고 우걱우걱 먹으면서도 침을 질질 흘리는 사형수처럼


도서관 책을 대하며, 내 앞에서도 책을 놓지 못하여 눈총을 잔뜩 받고도 맨 앞자리에서 당당히 혼자 책에 빠져 히죽대며 앉아 있는 톨스토이 소설 속에서나 본 낯선 이름의 아이


반이 훨씬 넘게 있는 한국 아이들이 멋대로 휘갈겨 쓰는 한글을, 천천히 가장 예쁘게


세로 긋기 획을 확 꼬부려 시작하는 저 궁녀들의 서체, 석봉체


그 책벌레 아이만 보면 키팅 선생도 저절로 흐뭇한 미소가 핀다


청소도 가장 잘 도와준다


(2학년 때 다 못한 청소를 4년 뒤에 도와주고는 며칠 뒤 한밤중에 차에 치어 불귀의 객이 되어 내 가슴에 사는 내 제자처럼)


천사같이 마음씨도 예쁜 그 아이


아이들이 쓴


이름 자 감별이 최고 난해하다 모욕적 한글 서체의 대 유행


- 내 이름이 뭐게요?


코딱지처럼 작게 쓰거나 보이지 않는 얼룩처럼 흐리게 쓰거나 자기만의 흘림으로 사정없이 휘갈긴 싸인체? 석봉이 울고 갈 예술체?


이름 석 자 쓰기가 이리 어려운가


낙관 글씨가 당락을 좌우한다는 입상 전략 정보를 입수하여


나는 내 이름만을 주구장창 연습해서, 서예대회 입상을 노리는 얄팍한 한글 서예가이건만


아 아라비아 숫자만이 구원이 되는, 참혹한 아이들의 논술 시험지


모두가 명필인 순전한 단군예의지국, 동탄지국 아이들


코로나 시국이 까마득히 지난 지금에도 꼭꼭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임시 선생에게 첫 인사를 오는 저 치밀한 성품


러·우 전쟁에 긴장하는 아이들에게 너희는 홍범도 장군의 후손이라고 해 주었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입에 풀칠이 시급한 외국이라서 바쁘디 바쁜 부모 밑이라서


한국말로도 대화가 적고, 세계 언어 중에서도 가장 배우기 어렵다는, 러시아 말이라서 그런가 모국어도 전혀 모르는 아이들


아무리 번역기를 들이대도 모르는 척, 게임 삼매경에 하루 한 시간만 자는 아이 무인 점을 털고 자정까지 걱정시키는 아이 싸우느라 장난치느라 바쁜 아이 분노하여 책상 위로 올라가 길길이 날뛰지만 말이 안 통하는 아이


모국어도 한국어도 전혀 쓸 줄 모르고, 문맹의 무시무시한 폭력성을 가슴 가득 가지고 따돌림 당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아이들


- 왜 왔니? 왜 왔나요?


부모를 붙들고 묻고픈 절절한 마음, 아무리 먹고사는 일이 바빠도 당신들의 뿌리는 글이 될 것이니


제발 영어가 안 되면 모국어든 한국어든 문맹 만은 면해야 한다고, 그래야 최소한의 삶이 아니냐고


우리도 태평양에서, 현해탄에서 어느 나라에도 발 딛지 못한 가난한 삶이 있었나니


졸아 드는 출산율과 거대 노인국이 나이야가라 폭포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라에서


눈물의 이별을 해준 개구쟁이 삼 학년, 선행 학습의 희생자


'강남 스타일' 노랫말을 바꿔


식물 단원을 정리해주던 감동스러운 모범생


무심결에 아빠해 달라던 아이


육십 년째 학교에 다니는 나를


사무사의 공자 마음과 무구의 눈물로 감동시키던


아 행복한 희망의 나라, 꼬마 시인들만 사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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