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였다. 의기소침하고 조용했으며 어디서도 나서기를 주저했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자신을 자책했다. 주눅 들고 눈치 보며 살았다. 그런 그녀가 신앙을 갖고 나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괜찮지 않은 나여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신의 존재를 만났다. 그리고 삶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사막에 떨어져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겼다.
그러나 옛 모습은 그녀를 계속 과거에 매어 두고 불편하고 익숙한 곳에 머무르게 했다. 그녀는 정신건강사회복지사 수련과정을 1년 받았다. 처음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보는 게 그저 신기하고 호기심이 갔다. 아마도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뭔가 끌리는 게 있었기 때문에 그 길에 들어섰을 것이다.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은 “너는 경직되어 있어. 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해봐.”라고 그녀에게 충고했다.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뭐 어때서? 난 지금 불편하지 않은데...’ 다른 사람들이 보는 그녀를 그녀는 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용기도 없었다.
수련을 받기 전 정신병원에서 한 달의 실습과 이론으로만 무장된 상태였다. 그들은 남들이 들리지 않는 게 들리고 보이고 느껴지는 세상 속에 살았다. 이상하고 괴이한 생각부터 체계적인 생각까지 현실 속에 있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의 얘기를 들었을 때 단지 호기심으로만 여겼다. 그들의 삶 속에 드리워진 질병이라는 암흑이 삶을 뒤덮고 있었다. 그녀는 그저 밖에서 구경하듯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매일 폐쇄병동에서 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계속 만나서 듣기를 반복하며 그들의 세상 속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도 병이 없었다면 그녀와 똑같은 일상을 꿈꾸고 살았을 인생이었을 것이다.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절망에 빠졌다. 그들을 보며 그녀의 마음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와 그들의 경계는 무엇일까?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있는 환자와 치료자인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진짜 차이라는 게 있을까? 그저 이론상 구분 지어진 진단명은 아닐까? 그녀도 어쩌면 인생을 살다가 병에 걸리면 환자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녀는 폐쇄병동에서 치료자로 있다. 그녀에게는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상처와 아픔이 있다.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자신을 보호할 기능이 있어 그녀의 아픔을 숨길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을 통해 그녀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의 우울감과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면 추상적이고도 막연한 죽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표현하거나 말하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그녀였다.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던 건 그들이 아니었다. 정작 그녀가 도움이 필요해 폐쇄병동에 들어온 것이다. 어쩌면 차마 내 발로 들어올 수 없던 이곳을 치료자의 옷을 입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부터 그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출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와 그들이 함께 치료를 주고받으며 성장하기 위한 곳이었다.
그들과 만나는 곳에서 희망을 꿈꾼다. 그녀 삶에 희망을 꿈꾸듯이 말이다. 그들이 겪고 있는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찾기를 소망하게 됐다. 그들에게 심긴 작은 불씨가 마치 그녀의 삶에 불씨로 옮겨 붙는 느낌을 받는다. 그들의 삶을 구원할 수 없지만 그녀로 인해 조금이나마 희망과 위로가 있기를 매일 기도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딪힌 현실은 계속되는 재발의 고통과 지속적인 일상생활의 어려움이었다. 누구나 모양은 달라도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할 수 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적나라하게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난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렇게 정신병원, 정신보건센터에서 7년을 근무하며 그녀 자신과 사람을 보게 되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 무시하기 쉽지. 마음을 보려면 눈을 크게 뜨는 게 아니라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거야.’라고 그녀 스스로에게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한 개인의 마음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층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그들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는지는 그들이 보여주는 깊이 그만큼이었다. 그들이 허락해야 그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이 마음이 바뀌면 그들 마음 주변에서 서성거려야 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 스스로 마음열기를 결정해야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 깊이는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다. 계속 파고 파도 새로운 마음이 나타난다. 어쩔 때는 다 안다고 생각했다가 돌아서면 ‘너 누구니?’라는 질문이 되돌아온다.
과거 정신분석 선생님은 말했다. “정신분석은 훈습이에요. 스스로 통찰한 것을 계속해서 실천해 옮기며 적용하는 거지요. 분석이 끝나도 그 훈습은 계속되어야 해요.” 이제는 그 자리를 떠나 있지만 매일 그녀 자신의 마음에 노크를 하고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 때로는 숨바꼭질처럼 잘 보여주지 않고 숨어버릴 때도 있다. 그때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보여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익숙하고 불편한 곳으로 다시 도망가고 싶은 그때 그 마음을 되돌려 앞으로 한걸음 나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오늘도 익숙하지만 불편한 마음을 마주한다. 불편한 마음을 인정해야 비로소 새로운 출발이 시작된다. 낯설고 두렵고 익숙하지 않은 건강한 마음을 만나려고 나아간다.
그녀는 오늘도 마음에게 노크를 한다. 똑.. 똑.. 똑.. 햇살 가득한 오후 거실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멍 때리기를 한다. 마음은 내게 말을 건넨다. ‘그냥 너여서 좋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냥 너여서 참 좋다.’ 그 말이 참 따뜻하고 위로가 된다.
이제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 그녀와 다른 별개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도 살다가 아프면 그들과 비슷한 절망에 빠질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삶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와 그들은 다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 세계는 서로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아야만 알 수 있다. 그녀와 그들이 서로 연결되고 교류할 때 그녀가 보지 못한 그녀의 마음 세계를 그들이 보여줄 수 있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마음 세계를 그녀를 통해 그들이 볼 수 있다.
오늘따라 온 세상 사람들이 무지개 색깔로 물들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다채롭고 수 십 가지의 빛깔인데 단 하나로 규정되는 회색빛이 싫다. 그 빛깔이 고통, 아픔으로 점철되었든 아니면 희망으로 나타나든 고유한 색깔이다. 각양각색의 무지개 색깔들이 사람의 마음을 채우고 그만의 빛을 바란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처럼 사람들 속에서 빛나는 그들의 고유한 빛깔을 볼 수 있는 이 세상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