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차,깊숙이 침투한 공적 영역은 어디까지일까?
2022년 1월 30일 일요일
어제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은 효과가 강한 이유일까? 눈을 뜰 수가 없다. 눈꺼풀이 무겁고 눈뜨기가 힘들다. 요즘 드는 생각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이 매일 무한 반복되는 시간 속에 갇혀버린 느낌이다. 아이들이 건강해지고 안정되니까 드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한마디로 여유가 생기니까 찾아오는 잡념이라고 해두자.
오늘 우연히 유튜브로 조던 피터슨 교수가 코로나 팬데믹에 대해 말한 것을 보게 되었다. 2년의 기간 동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미명 아래 강력한 국가의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고, 이로 인해 국민의 자유와 경제적 손실이 어마하다는 것이다. 영상을 격리 전에 봤다면 ‘그래도 국민의 건강이 우선이지.’ 넘겼을 것이다.
‘통제’라는 단어에 꽂혔다. 맞았다. 나는 통제당하고 있었다. 공적 영역인 국가가 개인의 영역인 사생활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조종하고 통제한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화가 난다. 사람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 큰아이는 일반적인 감기보다 덜한 코로나 증상이었다. 일반적인 감기는 3일 치 약을 먹고도 안 나아 추가로 3일 치를 먹어도 나을까 말까이다. 이번 감기는 이틀 정도의 열과 간헐적인 기침으로 끝났다. 기저질환이나 코로나 바이러스에 취약한 사람들에게는 중점적인 치료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무증상이나 경미한 증상을 이렇게 가둬놓고 사육하듯이 통제할 필요가 있을까? 결론은 전염되기 때문이다. 악순환이다.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80%가 넘었지만 확진자수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다른 변이 바이러스가 생겨 더 증가된다.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핸드폰에 보호와 관리라는 미명 아래 위치 추적 앱을 깔아 내 위치를 확인한다. 솔직히 두 자녀는 핸드폰이 없어 나 혼자만 깔아놓은 상태이다. 속이려고 마음먹으면 핸드폰을 놓고 외출을 해도 무방하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성격이다. 하라고 하면 하는 길들여진 성격이다. 하라는 대로 하면서 열 받고 화가 난다.
공무원들은 밤샘 작업을 하며 일을 하고 있고, 의료진 역시 그 갑갑한 옷을 입어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다. 자영업은 말할 것도 없다. 자영업자들은 시간제한에 갇혀 제대로 된 수입이 없다. 누구의 탓을 할까? 늘 어디서나 있을 법한 코로나바이러스의 멱살을 잡고 한판 뜰 수는 없는 노릇이고 미칠 지경이다.
이제는 코로나에 대한 방향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번 학원 발 코로나 확진자 발생으로 학원 선생님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하지만 결국 발생한 곳의 영업장은 죄송하다는 말을 달고 있어야 한다. 사실이 아닌 뜬구름 잡는 카더라 통신들이 들고 일어선다.
내 사적 공간이 사라진 느낌이다. 격리 전까지 분명 우리 가족의 공간이었다. 격리 후 이곳은 사람을 격리시키는 곳이 되었고, 격리 대상자를 케어해주는 역할만 존재한다. 이곳은 더 이상 사적 공간이 아니다. 오전 오후 열 체크와 임상증상을 보고한다. 각 방에 두 아이들을 가둬놓고 식판에 음식을 담아 각자의 방에 갖다 놓는다. 방에서 아이들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발 빠르게 움직여 방에 넣어준다. 큰 아이는 24시간 안방 문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 둘째는 확진자는 아니라 잘 때는 거실로 나와서 거리두기를 하고 같이 잠을 잔다. 개인의 사생활이 분명히 침해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명분이 숨통을 쪼이고 있는 건 확실하다.
매일 똑같은 비좁은 장소에서 관계를 무한 반복하면서 나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오늘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냈다. 소리를 질러놓고 순간 또 후회하고 아이들에게 사과를 한다. 내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진 상태라는 신호이다. 탈출구 없는 공간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느낌이다. 아직 9일이 남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
어떤 하루를 보내며 무기력감을 느끼고 어느 순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일부터는 설 연휴기간이다. 이 공간에서는 설 연휴는 없다. 오늘과 같은 내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두 아들은 먼발치에서 문을 열어놓고 끊임없이 대화를 한다. 그리고 거실을 사이에 둔 먼 거리지만 서로 마주 보며 체조를 한다. 시키지도 않았지만 인간의 본능일까? 끊임없이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찾는다. 아마도 소통은 살기 위한 생존의 길이고, 그들의 정서에 안정을 주는 길임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 전염병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니다. 코로나로 파생된 격리 시스템이 한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정신적인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나는 외롭지 않은데 격리 시스템이라는 상황이 사람을 더 고립시키고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