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어요

by 범고래



찬바람이 종일 큰 아카시 나무를 흔들고 대추나무가 사그락거리며 바쁘게 몸 털기를 한다. 곧 다가올 겨울에 부쩍 예민해진 마당의 식물들.

그 가운데 늦둥이 장미가 두어 송이 피었다.
5월에 한껏 피고 기운이 다 떨어져 더운 여름과 가을장마를 힘들어하더니 뒤늦게 해실하고 작은 얼굴을 내밀었다.

예쁜 아기를 맞이하듯 사랑스러운 꽃송이에 살짝 입을 맞추고 향을 맡아본다. 어디서 이렇게 우아하고 달콤한 향을 피워 올리는 걸까 작은 꽃잎 사이사이로 품어내는 향이 비현실적이어서 잠시 머리가 어질 하다.

가시를 잔뜩 달고 온몸으로 접근을 막는 까탈스러운 성격. 키우기가 여간 힘들지 않지만 5월이 되고 따뜻한 햇볕이 노랗게 마당을 덮을 때 그 위로 스물다섯 종의 장미가 향연을 펼치면 일 년 동안 오며 가며 긁히고 찔린 나쁜 기억은 순식간에 다 없어지고 만다.

절대 길들지 않는 야생 고양이처럼 할퀴어대던 지긋지긋한 가시 공주. 하지만 이때만큼은 장미꽃 덩굴에 얼굴을 푹 파묻고 한때 온갖 저주를 퍼붓던 입으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게 된다.

마당은 새콤하고 달콤하고 은은한 천상의 향의 선율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느라 시끌벅적하다.
사람과 동물이 밖으로 나오고 온갖 곤충들조차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작은 마당을 꽉 채운다.

그렇게 한바탕 파티가 지나간 그 자리에 이제는 노랗고 빨간 단풍나무 산딸나무 화살나무들이 색의 향연을 펼친다. 짙은 가을 속으로 끌려들어 가 바스락거리는 나뭇잎과 살짝 소름이 돋는 서늘한 바람을 맞고 가을의 춤을 춘다.

노랗고 숨찬 보름달이 하늘을 가득 채울 때까지 쉬지 않고 춤을 추다 보면 어느새 내 몸도 둥실 떠올라 달 속에 있다. 달이 나인가 내가 달인가

이렇게 풍성하고 아름다운 축복을 주는 전원의 크고 작은 모든 생명체들이 나에겐 형제이고 부모이다.
내가 태어났고 다시 돌아갈 집이다.

조용히 귀 기울여보면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툭툭 말을 거는 작고 여린 생명체들을 찾아볼 수 있다.
어제부터 천막 위 경사진 곳에 부동의 자세로 자리 잡고 앉은 사마귀는 오늘도 딱 그 자리에 앉아 지나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미 하루가 흘러간 걸 모르는지 도를 닦는 건지 혼자 바쁘기가 미안하다. 이제부터 뒷길로 돌아다녀야 하나.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이 바쁘다.
부지런히 씨앗을 만드는 베르가못과 에키나시아, 드르륵드르륵 구멍을 파는 오색딱따구리 그리고 떨어지는 밤송이에 신난 다람쥐. 건너편 이웃 마당에는 주황색 감이 주렁주렁.

가을이 잘 익어가고 있다.
황금빛으로 넘실거리는 들판이 배부르다.
더 바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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