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않은 길

나로 살기는 어려워

by 범고래




이번 공모전은 일정이 많이 늦어졌다.
연말연초를 끼고 간신히 올해 라운드에 슬라이딩하는 모양새다. 보통은 가을을 넘기지 않고 치러지는 연례행사가 주최 측 사정으로 그리된 모양이다.

올해 초 나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이마에 굳은 결의의 띠를 둘렀다. 그리고 공모전 참가를 위해 80호 캔버스를 사들였다. 50호 이상 100호 이내라는 규정에도 100호는 너무 거대하고 무거울 것 같아서 조금 작은 80호를 샀다. 하지만 대부분의 참가자는 100호 이상을 선택하고 거기에 넓은 액자까지 더해서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몇 년 전에도 도전했다가 입선도 못하고 탈락한 경험이 있어서 이번에는 더욱 세심하게 준비를 하고 시간적 여유도 충분히 두었다.

뭘 그릴까,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 밑그림을 그리고 아이디어를 더하며 조금씩 그려나가다 보니 몇 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단순한 사실 묘사를 넘어 내 생각과 철학을 담아내려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났다.

덧칠하고 개선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끝도 없는 터치와 리터치.
이제는 진도 다 빠지고 처음의 기세 좋던 결의는 어디로 갔는지 점점 불안해지고 절망적이 되어간다.

또 떨어지면 어떡하지...
너무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
일 년 동안 들인 노력과 정성이 물거품이 되는 거야.
고시공부도 아니고 뭐 하는 거람.
중얼중얼... 정신이 혼미해진다.

좁은 거실에 거대한 캔버스는 가족들의 발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며 구박덩이가 된 것 같았다. 일 년 가까이 나 때문에 불편했을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초등학교 때 나는 미술시간이 제일 기다려졌다. 매시간 다양한 재료를 준비해 만들고 그리고 찍어내고 하며 완성된 작품들은 마술쇼를 보는 것만큼이나 나를 매료시켰다. 그래서인지 별 노력 없이도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다.

한 번은 학교 대표로 다른 아이와 함께 그리기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각자 자기 그림을 그리면 좋겠지만 같이 그린 협동 작을 내도록 했다.
우리는 커다란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꽃과 나비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이 간 아이는 너무 정형화된 꽃을 아무 고민 없이 쓱싹쓱싹 그려나갔고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망했다고 느꼈고 내 생각대로 우리가 그린 그림은 입선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아쉬움은 지금까지도 남아 생각하면 여전히 속이 메슥거린다.

어릴 때 꿈은 화가였고 그 길을 가지 못한 난 항상 가슴 한켠이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의 그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본능 같은 것이어서 외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나는 갈림길로 다시 돌아와 그 앞에 섰다. 거기에는 내가 전에 가지 않은 길이 덤불이 우거지고 버려진 채 기다리고 있었다. 헤치고 나아가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그 길로 걸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다.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된 예술가의 삶은 어릴 적 환상과는 다르게 너무 암담했다. 먹고살 만큼 이미 여유가 있지 않으면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는 그런 좁고 험난한 길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굶주리다 단명한 유명한 화가들을 보면 아무리 천재성을 타고났어도 그 길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너머로 우리가 알지 못한 무명의 화가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태어난 대로 생긴 대로 자연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사람이 가장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는 그것을 위해 가난을 각오해야 하고 생활고로 큰 시련에 빠지게 된다.
그럼에도 그 막막하고 외로운 길을 포기하지 않고 뚜벅뚜벅 가는 위대한(그것만으로도 이미 위대한) 세상의 예술가들에게 내 모든 존경과 사랑을 바치고 싶다.
맹목적인 열정과 헌신을 끝없이 태우며 예술은 세상에 여전히 예술혼을 불사르고 있다. 예술가는 장작개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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