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나간 것들

슬프고 그리운 것들

by 범고래

긴 장마가 끝나고 뜨거운 태양이 지구상의 모든 것들을 지글지글 볶아대는 한여름이다.
잠시만 머뭇거려도 온몸이 고소하게 바싹 익어버릴 것만 같은 날들.

정원에 튜브형 수영장을 만들었다
물을 가득 채우고
가만가만 몸을 담그고 하늘을 본다.

파란 하늘빛이 햇빛에 바랜 듯 눈이 부시다.
너무 더운 한낮에는 새들도 벌레들도 조용하다.
시원한 물속에 몸을 쭉 뻗고 누워본다.

여름을 나기가 점점 힘에 부친다. 내가 좋아했던 그 여름이 이 여름이었나. 나도 여름도 변해 버린 것 같다.
하지만 어릴 적 여름은 내 머릿속에 여전히 아름답고 설레이는 추억들로 가득하다.

학교에서 여름방학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라 하면
아이들은 손가락에 몽당 크레파스를 움켜잡고
한번 가보지도 못한 해수욕장을 단골소재로 삼아 파라솔과 수박, 물놀이튜브를 허리에 끼우고 바닷물에 동동 떠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린 눈은 상상 속의 바다와 여름휴가를 하얀 도화지에 그리며 마음을 부풀렸다.

더운 밤이면 누가 가자할 것도 없이 동네 개천으로 몰려가 시원한 멱을 감았다.
에어컨이 없고 심지어 선풍기도 귀한 시절.
부채하나 팔랑대며 달빛 아래 두런두런 냇가로 향하던 그 하얀 형체들.
기억은 현실감이 없이 흐릿하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을까.
떠올리면 너무나 다정하고 행복해서 내가 만들어낸 상상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낮은 개울에 주저앉으면 시원하고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모래.
허벅지까지 넘실대는 물속을 겅중겅중 걸으며 담소를 나누는 엄마와 외할머니.
그 주위를 뱅글뱅글 맴도는 나.
그땐 몰랐지만 다시는 오지 않을 걱정 없고 행복한 시절이었다.

지나가 버려서 그런 걸까. 아쉽고 다시 오지 않을 것들에 대한 기억들은 미화되고 박제된다.
시간에 떠밀려 살다가 어느 때 문득
나의 눈에 들어온 과거 어느 시점의 사진이나 글들.
잠시 멈추고
그 시간 속에 들어가 머물며
손끝에 느껴지는 감정을 문지르면 아릿한 슬픔이 묻어난다.
사라진 모든 것들에 대한 애도이다.
행복한 순간 슬픔이 같이 느껴지는 건 이미 상실을 예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보 같지만 어쩔 수가 없다.

순간순간의 결을 조금 더 느끼며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리고 내 주변에 버려진
고통의 시간들도 모두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내 삶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숨이 안쉬어 지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