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배신한 동화 속 사랑

by 범고래

어릴 때는

사랑의 모든 완성은

결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읽어 온 책들과 영화 속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은 한결같이
사랑의 난관을 극복하고 결혼을 했고
그런 결말이어야 사랑이 완성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중도에 어떤 일로
누가 죽거나
혹은 헤어져서
결혼을 못하는 결말로 끝나게 되면
나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에 잠 못 이루고
슬퍼했다.

동화 속 결혼은 마치

결혼과 동시에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이후의 삶이 어떠했을지 어떤 의문의 틈새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어른들의 영역이었고
현실의 세계였기 때문에
우리가 관여해선 안 되는 거였을까

그렇게 사랑에 대한 막연하고 환상적인 생각이

결혼이라는 비밀의 문을 굳게 잠그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었고
대부분의 어른들처럼 돈을 벌고 사랑을 하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

순진한 어린 시절의 꿈을 지켜주었던 모든 동화책과

사랑스러운 영화들이 난 고맙다.
그렇지만

현실의 삶과 동화 속 삶의 간극은
너무 컸고
스스로 길을 잘 찾는 똑똑한 인간이 아닌 나 같은 바보에게는
그 간극을 메울 적당한 쿠션이 없었다.
시속 백 킬로 넘어 달리던 자동차의 충돌만큼이나
커다란 충격과 부서짐이
사전 예고도 없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결혼은
혼자 오르는 등산 같은 것이었다.
험한 바위산을 끝없이 오르며
깨지고 멍들고...

수십 년의 등반길에 피부는 거칠어지고

눈빛은 형형해졌다.
결혼은

또 하나의 깨달음의 길이 되었고 나를 성장시켜
사람 비슷한 뭔가로 만들어 준 것 같긴 하지만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좀처럼 낫지 않고
송진처럼 흐르는 상처의 진물이,
깨져버린 내 안의 뭔가가 있었고
항상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난 잘 들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귀를 막아 버리기도 했다.

시간은 어린아이에게 봉숭아꽃 같던 붉은 물을

손톱에서 지워 버렸고
그 아이가 꾸었던 꿈만 아스라이 눈가의 주름 위를,
시간의 강물 위를 타고 떠다녔다.
이제는
그 아이가 정말 존재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느낌이고
거북이 등딱지 같은 심장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흔적이 그때를 증거 할 뿐이다.

동화 속 신데렐라는 어땠을까

해필리 에버 에프터.
(Happily ever after
그 후로 쭉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지막 자막처럼
그렇게 쭉 행복하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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