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불

타인의 불행은 외진 해변의 썰물과 같아서 얼마나 덧없이 떠내려가는지

by Bella


처음에는 냉장고 속 생수병이 쓰러진 줄 알았고, 그 다음에는 건조기 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창가를 보니 건너편 공장이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큰 불을 가까이에서 직접 본 건 처음이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안전한 곳으로 얼른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뛰는 심장은 금세 가라앉고 비현실적으로 불타는 건물은 남의 일이 되었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명확한 사의 세계를 관조하는 기분이었다.

'상실의 시대'에서 와타나베와 미도리는 어느 주말 오후 집 옥상에서 큰 불을 구경한다. 그리고 불이 사그러든 후 갑자기 입을 맞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말 이외에 두 사람의 감정을 설명하는 말이 없어 처음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이 왜 입을 맞추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오늘 지척에서 불타는 건물을 바라보며 문득 그 구절이 떠올랐다.

아마 그 두 사람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타인과의 접촉으로라도 절실히 확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불은 맹렬한 기세로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태웠다. 거센 불이 타오를 때는 건조기가 돌아가는 것처럼 세찬 바람소리가 난다는 것을 나는 처음 알았다. 냉장고 속에 아슬하게 세워 둔 생수병이 쓰러진 줄 알았던 건 건물 옥상의 가스통이 터지는 소리였다.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내며 큰 불은 건물 전체를 뒤덮고 하늘 높이 검은 연기를 뿜어올렸다.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공장이라면 우리 집까지 위험할 수도 있겠다, 저 건물 안에 사람이 있을까, 있다면 도망가야 할텐데. 생각하며 나는 느긋하게 불을 구경했다.


누군가의 죽음과 절망, 재앙을 바라보는 눈이 이토록 건조할 수 있을까. 그냥 흔한 재난영화의 시작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와타나베와 미도리의 입맞춤 -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서로의 입술을 갈구한 순간이 이제서야 공감이 갔다. 죽음은 정말 한 끗 차이로 삶에 닿아 있었다. 그 순간에는 나도 누군가와 피부를 맞대고 부벼야만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것이 아닌 재난은 그것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에 있든간에 현실감이 없다. 눈 앞에 닥치지 않는 이상 불행은 얇은 피막을 둘러싼 채 투명한 유리벽 너머에 존재할 뿐이며,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되어 타인의 재난을 주의깊고 탐욕스럽게 관찰한다.


불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묘하게 평온했다. 아무도 소리지르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 무심한 손가락질을 하고, 사진을 찍고, 전화를 해서 가까운 사람에게 소식을 알리고, 느린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놀라거나 애통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안타까움은 금방 지나갔다. 나도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고 마치 연예인의 이혼 소식이나 의외로 맛있는 레시피를 발견했을 때처럼 잠시 호들갑을 떨었을 뿐, 초반 10분이 지나자 놀란 가슴은 자연스레 가라앉았다. 불타는 건물은 곧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폰 뒤로 아스라하게 보이는 큰 불을 배경 삼아 친구들에게 짧은 카톡을 보냈다.


불은 한 시간 후에 꺼졌다. 골목이 좁아 소방차가 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모양인지 맹렬한 불길은 작은 소방차가 세 대 연속으로 사이렌 불빛을 반짝이며 골목으로 들어간 지 십 분 남짓 지나자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세찬 바람소리도 멎었다. 이상하게 허무했다. 심지어 조금 아쉽기까지 했다.


누군가에게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큰 일, 나에게는 평일의 작은 에피소드. 내게 일어난 큰 재앙도 타인의 눈에는 그저 사소한 사건에 불과하겠지. 그것이 내 인생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릴 불행이라 할지라도, 삶의 터전을 모두 태워버리는 불길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는 짧은 오후의 이야깃거리일 뿐이다. 늦은 밤 지역 뉴스에서 오늘의 화재를 보도하는 것을 보며 나는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기자는 다급한 목소리로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처럼 '오늘 오후 4시경 OO동에 큰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라고 말했다. 정작 그 화재를 바라보던 나는 처음 몇 분을 제외하고는 집 안에서 내내 평온했다. 그 거리감이 낯설고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지척에서 타오르는 건물을 바라볼 때의 기분은 영화관에서 나오며 '내게는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라고 잠시 이기적인 안도를 느낀 후에 쓰레기통에 팝콘 통과 콜라 컵을 버리며 복도를 나올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혈관을 타고 도는 내 피의 온도는 일정하다. 하지만 가끔 이런 나를 마주할 때, 예를 들면 빨갛게 불타는 건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의 서늘함을 느끼는 순간마다 나는 내가 한 마리의 변온동물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게 조금은 슬프다. 예기치 못한 불행과 마주쳐 삶이 모조리 무너지는 순간의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며, 다급하게 잡은 누군가의 손이 오늘의 나처럼 오싹하게 차가운 온도일까봐 겁이 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신의 조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