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머리칼을 팔아 시계줄을 샀다고?

[ 매거진 ] G 아카이브

by Gun Choi



소영이가 다녀갔다.

깍쟁이 같은 그 애는 신혼 초 집들이 때부터 내 찻잔 세트를 샘냈다. 문양이 수려하다는 둥 손잡이가 깔끔하다는 둥 우리 집에 들를 적마다 장식장 속 찻잔들을 고양이가 어항 속 금붕어 보듯 했다. 그만한 것이 그 찻잔들은 누가 봐도 탐낼 만큼 예쁘고 소담스러웠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결혼선물로 준, 로열 크라운 더비 칼튼 골드. 친구와의 소중한 추억까지 함께 선물 받은 거라 행여 흠집이라도 날까 한 번도 쓰지 않았다. 매일 호호 불며 닦고 우단으로 받침까지 만들어 장식장에 단정히 놓아두었던 찻잔.


언젠가 뜻깊은 날을 맞게 되면 남편과 나 사이에 놓여 있어, 잘 찍힌 기념사진처럼 조화롭기를 매만질 적마다 기대했다. 그런데 그 찻잔들을 소영이에게 주어버렸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날 모임에서였다. 초저녁부터 술 잔치가 벌어진 그날 친목회에서 그이는 별로 술을 마시지 않았다. 물론 옆에 꼭 붙어 앉아 심심치 않게 눈총을 준 나 때문이기도 했지만 흡사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 온 아이처럼 남편은 모임 내내 의기소침해 있었다.


회사에 사표 내고 8개월째.. 금방 출발할 줄 알았던 이민 수속이 늦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답답했다. 한참 더 늦어질 수 있다는 영사관측 말에 남편은 가기 전까지 단기간이라도 잡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원하는 직장이 바로 잡히지 않고 저금한 돈은 점점 줄어드니 마음이 편치 않은 거다. 우연히 그날 모인 남자들 중에 남편만 직장이 없었다.


그렇다고 뭘 저렇게 풀 죽어있지? 여자 마음이란 이런 경우 미묘해진다. 매 맞고 들어온 아이에게 위로 보다는 추궁이 앞서듯 애처롭기는 했지만 불편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눈에 거슬리는 건 남편 손에 들린 분식집 이름이 박힌 일회용 라이터였다. 가스가 다 됐는지 잘 켜지지도 않는 라이터를 ‘틱틱’ 대며 불을 붙이려 애쓰는 모습에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옆에 놓인 남의 라이터를 집어쓰면 될걸, 남편의 고집은 바람도 없는 실내에서 한 손으로 바람막이 시늉까지 해가며 집요하게 신경을 거슬렸다. 보다 못한 내가 식탁 위 라이터를 넌지시 건네주면 그제야 마지못해 불을 붙이고 벽에 등을 기댄다. 그러나 잠시후면 또 분식집 라이터를 ‘틱틱’…


나는 그때까지는 남편이 마냥 못나 보였다. 그런데 눈을 흘기려다 바라본 그의 처진 어깨가 불현듯 싸한 느낌의 동심원을 그리며 커져왔다. 얼마나 든든하던 어깨였던가. 그 어깨에 반해 결혼했는데. 그제야 나는 다른 사람들 손에 눈길이 갔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그들의 라이터와 옹색한 남편의 분식집이 오버랩되자 울컥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웬일인지 마구 먹고 싶어 졌다. 느닷없이 식욕이 동했다. 남편의 못 마땅한 표정이 스쳐갔지만 아랑곳 않고 정신없이 먹고 또 먹었다.


그날 이후 나는 커피와 헤어졌다. 하루에 예닐곱 잔은 마셔야 일상이 자유롭던 내게 그 다짐은 결코 녹녹지 않았다. 그러나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 할 시기에 내가 있다면 못할 결심도 아니었다. 빠듯한 살림에 아무리 요리조리 맞춰봐도 만원 한 장 빼다 박을 틈이 없었다.


그렇게 내 찻잔 세트는 소영이 손으로 넘어갔다.


조금 있다 점심을 먹고 요 앞 백화점으로 쇼핑을 갈 거다. 벌써 흥분된다. 며칠 전부터 눈여겨보아 둔 자주색 케이스의 은장 라이터, 지포 아머 하이폴리쉬. 비싼 라이터다. ‘ 담배 좀 줄여. 누굴 위해? 사랑하는 날 위해! ‘라고 경고문도 함께 선물할까 보다. 이제는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다 라이터 툭툭 던져 버려. 자기답게. ^^


문득 달력에 동그랗게 표시한 결혼기념일 날짜가 코끝을 맹맹하게 한다. 그러나 마음은 전에 없이 잔잔하고 흡족하다. 커피를 대접에 가득 타서 마시고 싶다는 나약한 생각이 살짝 든다는 것 빼고는.




아이참~ 신경 좀 써줘.

선배와 헤어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내친김에 오 부장님한테도 찾아가 상의해 볼 요량이다. 요즘은 걷는 게 몸에 밴 듯 여간 자연스럽지 않다. 어디든 갈라치면 지름길을 먼저 떠올린다.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낼 거리를 걸어 교통비를 아낀다.


구십구 년,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처럼 정말 지구 종말이 오는 걸까? 가끔은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걷기도 하지만 대개는 집에 있는 아내 생각을 하며 목적지로 간다.


아내는 오늘 아침까지도 내가 눈치채지 못 한 줄 안다. 그러나 남자도 반년 넘게 놀다 보면 집안 살림이며 세세한 일상까지 눈이 밝아지는 법이다. 아내는 얼마 전부터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하와이 코나는 물론 국내산 드립 커피도 내려마시는 걸 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식사를 마치고 나서나 청소를 끝낸 후 또는 가계부를 뒤적이다가도 느닷없이 주방으로 달려가 냉수를 벌컥 인다. 아내는 연애할 때부터 커피를 좋아했다. 커피잔을 마주한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아내의 공간에는 각종 원두를 담은 파우치와 찻잔들이 보이는 게 당연한 풍경이었다.


아내는 그중에서도 순백의 본차이나 바탕에 금박문양이 둘러져있는 영국산 수제품 커피잔을 유독 아꼈다. 웃기는 게, 책을 보며 커피를 마실 때도 그 커피잔은 관상용처럼 테이블 옆에 두고 다른 머그컵으로 커피를 마시곤 했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는, ‘그 커피잔이 나보다 좋아’?라고 평소 농담하며 아내의 애착을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췄다. 내심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모른 척해버렸다. 이민이라는 불안정한 도전에 자신의 작은 행복마저 짜 맞추려는 아내의 다짐은 묻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아내의 조용한 변화를 눈치챈 건 그날 친목회 모임에서부터였다. 초 저녁부터 술판이 벌어진 그날, 아내는 지나치게 폭식을 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어댔다. 하도 민망해 여러 번 눈치를 줬건만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입안 가득 삼겹살을 넣고 돌아보는 아내와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겸연쩍은지 빙긋 웃고 주변을 돌아다보는 그녀.


아내의 맑은 이마가 애틋함으로 다가왔다. 결혼 전 콧대 높고 까탈스럽던 그녀는 불과 일 년 만에 적지 않게 변해있었다. 밝은 형광등빛 아래 그저 그렇게 차려입은 아내의 사뭇 핼쑥해진 얼굴이 내 무능함을 부끄럽게 대변하고 있었다.


하필 라이터도 잘 켜지지 않아 어렵게 담배 불을 붙이며 나는 그때 다시 한번 깊이 고민을 했다. 과연 이민 가는 게 잘하는 건가? 우리 가족 운명이 바뀌는 일인데.. 내가 내린 결정이었기에 그 책임감은 가장으로서 엄중하고 무거웠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슬그머니 일어서 계산대로 갔다. 나는 당황했다. 아니 저 사람이 왜 독박을 쓰려하지? 뭘 잘못 먹었나? 다행히 주인과 잠시 얘기하고는 다시 내 옆에 왔다 그리고 뭔가를 건넨다. 그 음식점 상호가 박힌 일회용 라이터가 한 움큼이었다. 어처구니없어 실소했지만 내 곁에는 그렇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내가 있었다.


사직동 뒷길을 걸어 문예서관 앞을 지난다. 어느새 가로수에는 가을이 비친다. 오늘 집에 갈 때는 아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사야겠다. 담배를 끊은 지 일주일. 아내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안 피우고 이렇게 걸어 아낀 돈으로 아내의 커피를 산다는 건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곱게 눈을 흘길 아내에게 한마디 해주려 한다.


‘ 잠만보 여사, 당신은 커피를 안 마시기에는 너무 잠이 많아. ^^ ‘ 그리고 애지중지하던 그 커피잔에 커피를 마시자고 조를 작정이다. ‘ 어디다 숨겼어? 아끼면 똥 되는 거야. 나도 오늘 커피 한 잔 션~ 하게 원샷 때린다! ‘ 조금 가슴이 뛰고 잠이 안 오면 어떻고 그까짓 속 좀 쓰린 들 대수겠나. 내 곁에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내가 있는데.


오 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오마주. 그리고..

시퍼렇게 젊던 시절 우리 부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