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만과 플라톤
파이드로스는 에피크라테스 집에서 나와 길을 걷다 실레노스 같은 남자, 소크라테스를 만난다. 소크라테스는 반가워하며 파이드로스에게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데, 파이드로스는 뤼시아스의 가르침을 받고 나오는 길인데 그의 조언으로 산책을 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뤼시아스가 유혹받는 소년이란 연설을 한 걸 들었다면서. 소크라테스는 그 이야기를 듣겠다고 한다. 흥미를 보이고, 유혹받는 소년을 바라보면서.
소크라테스와 파이드로스는 오레이티이아가 북풍의 신 보레아스에게 납치당한 강변을 지나 플라타너스의 성스러운 그늘이 지고 순결한 나무의 꽃향기로 가득한, 경사가 완만하게 진 잔디밭 위에 앉아 대화를 이어간다. 소크라테스가 신화로 구전된 사건을 합리적 해석을 담지한 의도로 갈파하여 소년의 마음을 빼앗고 난 뒤에.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에로스란 사랑, 수사학과 연설, 그리고 문자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이것으로 노련한 구애자는 이내 아름다운 소년의 마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것을 성공하고 만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토마스 만은 이 플라톤의 저작 파이드로스의 결말을 바꿔 넣어 사랑의 객관을 완성한다. 플라톤은 늙수그레한 현자가 아름다운 소년과 다시 함께 걸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맺지만 토마스 만은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를 남겨두고 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이제부터 우리의 노력은 아름다움에만 경주되지. 말하자면 단순성과 위대성 그리고 새로운 엄격성과 제2의 자유와 형식을 존중한다는 것이지. 그러나 파이드로스, 형식과 자유는 도취와 탐욕으로 치닫게 되고 고귀한 사람을 무시무시한 방종의 감정에 빠뜨린단다. 고귀한 사람 자신의 아름다운 엄격성이 그러한 방종을 불명예스럽다고 배척하는데도 말이다. 형식과 자유는 고귀한 사람을, 고귀한 사람까지도 타락의 나락으로 끌고 간다. 내 말은 그것들이 우리 시인들을 그리로 끌고 간다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상시킬 수 없고 단지 방종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이제 나는 가겠다. 파이드로스, 너는 여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거라. 그러다가 네가 나를 더이상 보지 못하게 되거든, 그때 비로소 너도 떠나거라.”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다 보면 두 가지 거리감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하나는 타치오를 바라보는 아셴바하의 거리감이고, 다른 하나는 이 둘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거리감이다. 후자의 거리감은 작가의 그것일 수 있고, 독자의 그것일 수 있다. 그리고 이 거리감, 객관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예시된 예술가적 소명과 궤를 같이 한다. 토니오 크뢰거, 구스타프 폰 아셴바하 둘 다 일반 사람, 소시민이라 할 수 없는 배경을 갖고 있음에도 독자가 그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난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사랑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이기에 모두가 사랑을 했거나 하고 있거나 할 수 있다면 토마스 만이 적어낸 두 인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크라테스는 사랑하지 않는 이들도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같다고 하면서 즐거움의 추구가 방종이라면 올바름의 추구는 절제라고 말한다. 오늘날 본성과 이성이란 맥락에서 이것을 이해해 보자면 올바르게 사랑을 하는 것은 결국 사랑하면서 사랑을 주지 않는 행위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사랑하는 이의 모습은 사랑받는 이들을 최대한 나쁜 상태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지혜롭지 못하게 멍청하게 만들고, 육체적으론 나약하게 해 사랑하는 이를 의지할 수밖에 없게 하는 것. 또한 사랑받는 이가 친구나 가족과 교류하는 것을 막고 사치를 제공하여 탐욕에 빠뜨리는 것을 사랑의 추구, 방종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사랑받는 이도 이성과 분별을 찾게 되면 오히려 사랑한 이에게 보상을 요구하거나 사랑의 제공이란 것을 거부하고 도망치게 된다는 것. 그래서 파이드로스에게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이성과 절제를 유지하는 사랑하지 않는 이들에게 더 잘해주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나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읽을 때마다 사랑의 이상적 모습이라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닌 사랑하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풍경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된다. 그것을 작가는 예술가적 소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행위로만 본다면 사랑하면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완성인 것이다. 모순이자 역설적인 내용. 하지만 그것은 예술이기에 세상의 진리 또한 진실이 된다. 그래서 완성된 사랑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슬퍼할 수밖에 없다. 영원히 그들을 그렇게 분열된 상태로 보존해둬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