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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소설 전집

10년 전

by 아라베스크


가시적 모든 건 모순적이게도 모든 게 불명확하오. 처절하고 통절한 아픔과 그걸 잣는 비극은 보이는 것만큼 느껴지지 않아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오. 어찌 이리 쉬, 모든 게 잊힐 수 있는 건가요? 사상(沙上)의 누각은 목측 되는 것만큼으로 게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반증하고 있고, 이젠 그것을 삶이라 명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닌가 싶소.

"모순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것만큼 모순이라는 것은 진리이다."

- 십이월 십이일. 삼백이십칠 쪽.

스무 살 이상은 소설 한 편을 썼소. 그 글은 그의 가장 형식적인 글이었고, 마니에리스모적인 갈등이 있었소. 불초에겐 춘원의 글, 제위에겐 첨위에 맞는 당대 문인들의 편린 같은 보편성이 느껴질 것이외다. 그렇지만 탁월함이 도회한 건 아니오. 그 탁월함은 글 초반 오롯이 담겨 있으니. 불초, 거기서 분노의 포도를 떠올리고 學松의 해돋이 序, 尙虛의 농군을 상기했지요. 장용학이 이어받은 비애도 목도하고. 허나 형식이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갈수록 진부해졌고 최절된 아픔은 결국 사라지고야 말았어요. 인과 고리를 얘기하게 된 작자가 그만 초지, 산비할 정도의 비애를 잊어버린 듯했지요.

지도와 암실로 比久의 글은 시작된 것이오. 폐결핵 진단 후부텀 글이 번드친 것 같단 말이오. 생략된 서술과 - 하지만 완만한 서술! 불분명한 묘사로 적히지 않는 행간은 짧고 덧없는 생이 사그라지는 걸 암시하고 있으니. 그걸 말하는 데는 긴 글이 필요 없었을 거외다. 글이란 건 길어질수록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 한다는 걸 그 역시 감득했을 테니까. 지질러워 지는 자신의 육체가 가없게도 작아지는 것에 혼도하기 직전까지 극력을 다한 게 그가 남긴 글이오. 단 한 번도 희망을 적지 않은 글이외다. 낙관은 무엇에도 찍히지 않았소. 그의 친우 김유정을 대했던 실화에선 친우의 죽음 이후 미구에 일본에서 그의 비보가 전해진 것이 떠올라요. 異國種 강아지가 잃어버린 백국. 무류한 사람들. 그걸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사람은 필경 미친 게 틀림없겠지요.

이상의 글에 완연한 아름다움은 딱 한 번 적히오. 역시나 비애를 놓지 못한 글이지만, 거기서 이별을 담고 있는 이름 금홍이는 작자가 삶을 아름답다 말할 수 있는 珍無類한 보통 명사가 되지요. 그 붉은 비단 같은 이름으로 봉별기는 내 평생 가장 아름다운 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글 마지막에 왜 그가 영변가를 불렀고, 금홍인 육자배기를 불렀는지 반드시 의료하길 바라오. 이상은 지주해시 이후 어떠한 현상도 도나캐나 유루한 것으로 적은 것이 없으오. 걔들이 구축한 어휘간 조응은 탁월한 필로를 내어 희대미문의 문장을 엮어냈지요. 그것의 절정이라 함은 종생기를 들 수 있오. 필시 작금의 독자가 난독할 이 서른한 장의 글은 그의 재재바름이 무의미하고 난마 할수록 전율을 느끼게 해, 한 글자만 달랐어도 그 위세는 경위했을 것이외다. 아니 오히려 그리하여 박빙으로 의사한 게 아니겠소? 美文, 미문, 曖呀 美文! 최국보의 시 少年行에서 珊湖鞭을 採文하여 자신을 예술에게로 박차를 가한 한 마리의 白馬로 치환시켜 버린 것이오. 走馬加鞭. 그 珊湖鞭을 놓아버린 것이 바로 똘스또이의 실패인 게요. 유언의 내용과 유훈의 파급이 똘스또이의 허울 좋은 인생에 흠집을 낸 것이 아니라 유언 자체를 남길 정도로 삶을 놔버린 것에, 예술로 정진하고 있는 그 길에서 자진하여 주저앉은 것을 이상은 再犯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 아니겠소?

"나는 내 終生記가 천하 눈 있는 선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놓기를 애틋이 바라는 일념 아래의 만큼 인색한 내 맵씨의 절약법을 피력하여 보인다."

- 종생기. 백육십일 쪽.

이 단편에서 첨위를 苦할 한자의 언어유희, 脫字, 變字, 單字는 한문으로 쓰일 땐 오히려 뜻을 명징하게 도영하기 때문에 친절한 축에 속하지만, 한글로 쓰인 적소의 어휘는 그야말로 다의적인 활용을 함축하고 있다 할 수 있지요. 그것들의 경이적인 쓰임새를 끊이지 않고 탄주하듯 읽을 수 있어야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그리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이오. 여기가 바로 작가의 보꾹. 엽색가인척 여자를 희롱하려 들지만 되려 자신이 희롱 당한 이 삼류 소설 같은 줄거리 속에서 문자가 밝힌 삶의 웅자를 목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白鷗는 宜白沙하니 莫赴春草碧하란 말의 역설을 깨단시킨 셈이 아니겠소?

의표를 둘렀지요. 그의 글은 의표를 둘렀지요. 자기 일을 깜냥한 현인의 자취처럼 보이기도 할 겁니다. 허지만 그 또한 몰각한 것은 유전자란 놈의 주문, 반려란 간구이외다. 이 굴레를 그가 고구하는데, 동해, 환시기, 그리고 단발이 이런 의미에서 연작을 이룬다 할 수 있소. 전실, 가내, 그리고 반려. 금홍이가 비워둔 그의 마음에서 연역적으로 연상된 이상형이오. 여기까지 고구할 수 있다면 아무개가 아무개를 간구하여 緣하게 되는 것이 뭔지 생각해 본 사람일 것이외다. 게 나의 맘인지, 그나 나는 것의 괴뢰가 아닐까? 하고.

그걸 위구하고, 그걸 도회한 게 그의 불세출작 날개요. 어딘가 모르게 고답적인 화자는 아내가 무엇을 하는지, 심지어 자신의 섭생마저 의구하지 않으려 하지요. 아내보다 아내의 부재를 사랑한 듯 보여요. 아내와 함께 있을 때가 아닌 아내가 부재한 애상을 사랑하는 게지요. 기생으로 짐작되는 아내의 매끽을 임감하려 하지 않아, 사달은 그런 고답적인 화자가 무람없게 아내의 공간을 침범할 때 일어납디다. 傾慕하는 匹夫, 輕侮하는 匹婦. 여기에 태서의 작중 인물 개츠비식 두려움이 만연한다 할 수 있지요.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아달린과 아스피린, 아내의 옷과 자신의 옷, 돈, 그리고 날개. 이걸 사회적 징후로 파악해선 오인이오, 이건 아내가 부재한 애상을 사랑하는 화자의 마음이 사랑의 부재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죠.

어느 시골 神父의 일기엔 허방에 대한 이야기가 있소. 까마득하게 깊고 암연한 구멍. 크게 벌린 대지의 입처럼 보이는 그 구멍을 바라보노라면 너무나 두려워 도저히 그곳으로 뛰어들지 않을 수 없다고. 세상 모든 전쟁의 원인인 바로 그 두려움. 지팡이가 역사하게 된 바로 그 구멍에서 노인은 담뱃대를 털지요. 미야자와 겐지의 多精多酷한 우의가 느껴지지 않소? 이걸 우리가 과연 모더니즘이라 할 수 있는 것이오? 모더니즘. 모더니스트. 그 말은 참으로 경편하오. 일말의 재고조차 허용치 않고 단정으로 정의하느니. 앞서 이상이 그의 시작부터 마니에리스모적인 면모를 보였다는 것은 그의 정신적 갈등이 대단키도 하였음에 그 병적 동인이 가하였고, 역사의 잔혹한 흐름이 그를 살게 두지 않아함으로 형식과 정신의 오솔길에서 현대에 이르렀단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외다. 불초, 적빈이 서린 도린곁에서 작가가 택한 前程에 信地는 매너리즘에 닿아있었고 거기가 그의 로마가 될 수밖에 없음을 언표하고 싶었소이다. 르네쌍스와 바로끄 사이. 그러나 조금 달라 보이는 그의 글이 특별한 건 다 금홍이 때문이 아닐는지. 絶勝에 酷寫한 景槪. 伯樂이 再顧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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