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소설과 영화를 하나로 묶어
2007년 4월 중순. 작가이자 기자인 후안 고메스 후라도는 신탁을 받아 이끌리듯 버지니아 블랙스버그에 당도하게 된다. 그에게 내린, 그를 사로잡은 CNN 뉴스 내용은 조승희 사건과 관련된 것들이었고, 블랙스버그에 도착했을 땐 후속 조사가 진행되던 상태였다. 그는 이때 있었던, 다른 나라 언어판에는 언급하지 않은 일화 하나를 한국어판 서문에 적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버지니아 공대 본관 건물 앞에는 커다란 안테나를 달고 있는 중계차들이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각 중계차 앞에는 미국 뉴스의 주요 스타급 앵커들이 얼마 안 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고, 각 매체에 할애된 그 조그만 공간에서 그들은 다른 방송사 기자들이 화면에 잡히지 않도록 본관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내게 충격을 주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이런 커다란 사건을 취재할 경우 어느 순간 방송 매체의 카메라는 회전하면서 건물 전경 전체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변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시청자들이 보고 있는 뉴스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저는 그 많은 사람들 사이로 슬그머니 들어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스페인에서도 존경받는 유명한 앵커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는 카메라에서 벗어나 의자에 앉아 있었고 셔츠 칼라에는 종이 냅킨이 가득 붙어 있었지요. 메이크업 아티스트 중의 하나가 그의 다크서클을 제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조수 중 한 명이 종이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지금 안경이 없어서 읽을 수 없네. 뭐라고 적혀있지?
공식 사망자 숫자입니다.
몇 명이야?
서른두 명입니다. 살인범 본인까지 포함하면 서른세 명입니다.
빌어먹을! 세계 신기록과는 너무 거리가 있잖아! 이제는 ‘역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란 제목으로 방송할 수가 없어.
KEVIN이란 이름은 게일어에 기원을 둔다. 의미엔 Kind, honest, handsome, beloved 등이 있고 항상 가장 많이 사용되는 남자아이 이름 Top 100이며, 한때는 상위권을 차지한 기록이 있는 듯하다. 통계를 보면 미국에선 X 세대를 전후로 케빈이란 이름이 가장 많이 쓰였다고 하는데, 현재도 케빈이란 이름은 많은 아이들에게 부여되는 이름이라고. 아마도 작가는 글을 쓸 당시 이 점들을 고려하여 가장 많다는 것에서 보편성과 작품 속 케빈의 외형적 특성, 그리고 아이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모성의 강박인 beloved의 아이러니를 함축하려 했을 것이다.
엄마와 말 안 듣는 아들이란 구도가 사람들에게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은데 - 유사한 감성과 소재면에서 - 아마 이 소설 케빈에 대하여의 긍정적 효과를 인정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오히려 난 투르게니프의 아버지와 아들을 떠올렸다. 아이에 대해 얘기한다는 소설 관점에 부정적 면모를 보았고, 케빈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매개가 있기 때문이다 - 케빈이란 캐릭터가 어떻게 잘못된 면을 가지게 되었는지 설명할 수 있는.
니힐리즘. 통상 허무주의로 해석되는 이 경향이 1820년대 말 러시아 신문과 잡지에 첫 등장했을 땐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무식한 경향이나 특징을 뜻했다. 그것을 전체주의 반동주의자들이 혁명가들을 지칭하는 욕으로 사용했고, 진보적인 인텔리겐치아들은 정반대로 비판적 사상의 각성과 과학적 지식 습득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불렀다. 아버지와 아들에서 아들인 바자로프는 니힐리스트, 권위를 부정하고 모든 걸 비판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 확신을 갖고 지지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도 개연성이 있기에 실제 생활에서 존중받고 수용하면 좋은 명제들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 바자로프를 저서 지식인의 표상에서 거론한다. “그는 관습에 도전하고 평범하고 진부한 것들을 공격하며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보이는 과학적이고 냉정한 새로운 가치를 주장합니다.” 태가한 오딘초바와의 사랑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정하고, 부모의 사랑을 냉담하게 외면하며, 결혼으로 비롯될 친구의 행복마저 비웃는 그는 예술조차 실리가 결여된 낭만주의의 허물로 가차없이 폄하한다. 느낌이라는 감득 형태를 비하하고, 그런 것으로 좌우되는 사람이란 다 똑같은, 더 깊은 곳에 도달할 수 없는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바자로프의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는 이 글, 케빈에 대하여에 관해 글을 쓰게 된 동기처럼 부정적 인식을 기반으로 발동되고 추동된다. 소설 케빈에 대하여에서도 이런 태도를 찾아볼 수 있지만 케빈의 ethos는 좀 다른 것이, 지식을 습득하고 경험하며 성견을 이룬 성인이 아니고선 간파하기 어려운 이미지의 허상성을 탄생 순간부터 통달한 듯 태어나 어른을 능가하는 아이가 되는 신화적 면모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유년 시절까지 케빈의 거부는 아무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과 닮아 있다. 태어났을 때부터 자의로 엄마의 젖을 거부하고, 반항과 거부의 의사 표명으로 6살 때까지 기저귀를 차고 지내며 모성의 배려를 모두 무시한다. 생활의 감각에서 기쁨을 찾으려 하지 않고 가학성 태도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업적을 삼는 케빈에게 작가는 타고난 재능과 뛰어난 학습 능력을 부여한다. 케빈은 뭐든 한 번에 모든 것들의 보편적 법칙을 파악할 수 있기에 오히려 환멸을 느끼며 더이상 알고 싶지 않다는 외계적 면모를 가지는데, 이런 면모를 소설 속에서 이미지 하는 것이 바이러스를 모으는 케빈의 취미다 - 케빈을 단지 악 자체로 기능하게 했다. 유해한 병균을 당연히 배려할 수 없듯이 제목과 정확히 반대되는 관념이 케빈의 특징에서 파생된다. 이러한 관념이 소설에서 필요한 장치라면 우린 이 왜곡의 논의를 정치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악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악은 정당한 논리를 지녀선 안 된다. 그러면 악이 정의란 입장을 두를 수 있는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은 신화적인 면모를 지닌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이해될 수 없는 것들이 악에게서 기능해야 악은 악으로서 순수해질 수 있다. 그럼 논의를 돌려, 우린 케빈을 이런 악으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소설의 의도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이 작품으로 얻는 인식은 악을 배척함으로 정의를 찾는 정의의 아둔한 정의로움 뿐일 것이다. 냉전 시대의 코믹스처럼. 그렇지만 우리가 이러한 책을 읽는 것은 사변적 사려와 거기서 도출해 낸 것을 올바른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고, 조금이라도 더 살기 좋은 사회로 변화를 도모하기에 긍정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가치관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도 결미에 이런 식의 긍정적 가치관에 기반한, 단지 악에 대한 흥미로만 점철되지 않기 위해 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그것의 설득력은 꽤나 진부하고 또 허무하다. 결말에 결국 더 큰 폭력에 굴복하는 것으로 참회란 길을 향해 문을 열어둔다는 것인데 이건 마치 강력한 권위를 기대하고 있다는 걸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셈 아닌가? 이러한 권위를 아르메니아 대학살 세대 2세인 에바가 전형적 미국인 프랭클린에게 신랄한 반어와 냉소로 사실상 요구하는 것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에바가 건국의 아버지의 이름인 프랭클린에게 엄격한 아버지상을 원한다는 것이다. 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미국 보수당의 입장을 이 엄격한 아버지상으로 설명한다. 세상은 앞으로도 계속 위험하고 살기 힘들 것이며, 아이들은 - 국민은 - 원래 나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선하게 다듬어져야 한다고 가정하는 선에서. 엄격한 훈육과 거기에 수반되는 강력한 권위의 아버지 위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사실상 귀족주의를 변해한 것과 상통하는 것이 있다. 미국 보수주의는 미국을 곧잘 하나의 가정(家庭)으로 비유하는 언급을 자주 하는데 - 건국의 아버지, 미국 혁명의 딸들이란 말처럼 - 조지 레이코프는 이렇게 국가를 가족에 연결하려는 어떤 의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족이란 가치 연구로 가족을 이해하는 두 가지상으로 국가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식을 도출했다. 앞서 말한 엄격한 아버지상. 그리고 자상한 부모상. 보헤미안적 특성과 합리적 사고에 페미니스트인 에바 캇차두리안이 자상한 부모의 상을 갖고 있다 생각했다면 케빈 앞에서는 보수주의의 엄격함을 간절히 원한 것을 떠올려 보길. 이 환원적 고리가 결국 이미지로 독자를 기만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것이다. 진정으로 자상한 부모의 면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아이가 선한 본성을 갖고 태어났다고, 그러니까 아이들이 사소한 죄의식에 괴로워하지 않게 쌍방향 의사소통을 하기 원한 건국의 아버지 프랭클린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을 프랭클린의 죽음이란 비극으로 보수주의적 알레고리를 완성시킨 것엔 소름이 끼칠 정도다. 가정하여 프랭클린과 에바의 가정이 국가이고 이 둘이 국가의 지도자라면 케빈과 셀리아는 어떻게 대입되게 되는가? 국민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만약 우리를 에바와 프랭클린 입장에 서있게 하는 것이라면 이 책은 우리에게 어떤 선택을 강요하고 있단 말인가? 만약 우리가 케빈이고 셀리아라면 우린 정말 이해하지 말아야 하고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란 말인가? 이 물음은 우리가 케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단순하지 않음을, 또한 케빈을 위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반드시 숙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린 일단 케빈에 대하여 외연적 형태만을 서술하는 객관적 시각밖에 지닐 수 없음을 통감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며 우려했던 1인칭 서간문 형식은 특성상 직접적 사건 묘사를 담기엔 핍진성이 상실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건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흥미본위를 위해 인륜의 중요한 가치를 훼손시키고 상업적 이득을 취할 거란 영화 제작사의 입장을 자가당착적으로 내세운 꼴이 됐다. 예를 들자면 프랭클린과 별거를 했고 그가 셀리아를 데려갔다는 암시를 마지막까지 유지한다는 점 - 의식 관련 문제였다면 사실을 왜곡시키는 수법이 아닌 초반부터 문제 심각성을 제시하는 게 옳지 않았을까 - 케빈의 살인 행각을 이야기 마지막에 배치하고 서간문 시점을 초월한 채 당시 순간을 추측한다며 전지적 입장에서 서술하는 것 - 극적 효과가 필요했다고 강조한 꼴이 되었다. 또한 악이란 존재 의의를 갈등을 위해서만 배치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악이 이 책의 제목이자 우리가 보살펴야 하는 아이라는 건 어떠한 의도일까? 초반에 언급한 매드 무비란 고발 소설도 제목과 - 이런 총기 난사 사건을 영화로 비유하는 건 극적 효과의 강조와도 같다 - “이 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고발 문학이다!”란 광고 문구, 상황을 비극적으로 수사하는 서술 방식 덕분에 동일한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만 매드 무비가 인정받아야 할 점은 조승희의 행적을 순차로 나열하고 거기서 주변인과의 관계로 우리들의 문제점을 도출해 내는 데 있다. 그러나 에바가 케빈에게서 흥미를 느끼는 시점은 인과 고리를 그대로 따라간다기보다 케빈의 신화적인 면모, 괴벽에 집중하는 것으로 인과를 무시한다 - 케빈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 젖을 거부한 아이다. 증오의 원인을 찾을 없음에도 그걸 일반화시킨 아이의 이름. 인과라기보다 복선처럼 느껴진 여러 의도가 글을 읽으면서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으며 난 에바가 강박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말과 달리 그녀의 책임을 조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에바의 능력을 초월하는 케빈에 대해 한탄과 냉소만을 퍼붓고 프랭클린의 훈육 자세를 비꼬는 에바에게서 오히려 이기만 느껴졌을 뿐이다. 나는 에바의 기억에서 소시오패스란 문제가 여자라는 의미를 거세시켰다는 에바의 불행에 국한되는 것을 보고 출산의 부정적인 면만 엿보게 했고 바로 이 에바의 불안을 독자의 불안으로 확산시켜 나갈 것이란 우려가 되었으며 결국 단산 의지를 확장시켜 갈 것이라 생각했다. 이게 정말 우리가 케빈에 대해여에서 논의할 수 있는 유일한 기제인 것일까? 우리가 이것을 논의하기 위해 이 소설의 소재에 공감해야 한다는 건 상업 논리보다 더 망측한 이기다. 그게 올바른 사회를 이루는 것에 일조를 한다 주장한다면 진화가 멸종과 같다는 식의 논리가 될 것이다.
영화는 원작에서 작은 변화를 주는 것으로 원작이 의도한 온전한 결실을 - 케빈이 사회에서 올바른 일원이 되는 - 주체를 바꿔 얻으려 한다. 작은 변화란 에바가 혼자 살기 위해 이사한 집을 복층 아파트가 아닌 단독 주택으로 바꾼 것과 에나멜페인트로 범벅이 된 집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상징화를 말한다. 오프닝에서 토마토 축제란 이미지를 에바의 쾌락과 더 나아가 타락으로 이미지화 한 것은 여행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아한다는 에바의 취향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영화는 이런 식의 이미지화로 의도적으로 파편화시킨 이야기를 - 플롯을 - 점철해 간다 - 회화적 덧칠처럼. 이런 이미지들 구축에 나는 의구한 것이 있었는데, 원작에서 각 캐릭터들을 구분하려고 이미지화한 여러 요소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질지 의문이 들어서였다. 케빈이 작고 짧은 옷을 계속해서 입고 있는 것, 에바가 미국을 경멸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이방인이란 사회적 의미로 해석할 수 없다는 점, 중요한 사건 매개인 리퀴드 플러머 등 이미지 점철식의 형식상 설명되지 못하는 여러 요소들이 있었고 설명되지 못하는 것이 암시 정도로 끝나는 것에 관객에게 무시되지 않을까 의문스러웠다. 특히나 리퀴드 플러머 사건 경우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부분은 형식의 난점을 드러낸 것이었다고 본다. 영화는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에바의 심정을 관객에게도 이입시키기 위해 중요한 것들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거나 암시하는 정도로 그쳤기에 - 그래서 캐차도리언은 캇차두리안 보다 더 연약하게 느껴진다 - 실리아 사건은 명확하게 구현되지 않았고 아마도 소설을 보지 않은 대부분 사람들은 에바가 식탁에서 케빈에게 묻는 장면으로 사건을 이해할 수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다만 어느 정도까지라 내게 묻는다면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도까지로. 사건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을까 추측하기엔 영화에선 소스가 많이 빈약했다. 난 이 부분을 들어 영화의 문제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영화가 이미지 트랜지션을 능란하게 구사하는 것엔 감탄할 수 있겠지만 관객에게 이해의 폭을 좁힌 점이야말로 영화가 주제가 아닌 형식에 천착했다는 증거였다. 이런 작품 형식이 마지막에 컴파운드 보우라는 상징적 도구를 특정 이미지로 규정하게 함으로 로빈 후드가 내포하고 있어야 할 교훈을 완전히 변질시켰다. 영화와 원작을 통틀어 케빈이 에바를 엄마로 의지하는 유일한 기간에 모자는 함께 로빈 후드를 읽는다. 케빈은 책 같은 것을 절대 읽지 않는다란 설정을 가지고 있지만 로빈 후드란 예외가 비극적 결과를 예견하게 된다면 이 로빈 후드란 책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작품의 엔딩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긍정적 - 의적 - 효과를 부정적 - 사냥꾼 - 효과로 변모시킨 감독의 의도인 케빈의 이해는 석궁도 - 소설에서는 - 어색하지만 컴파운드 보우라는 것은 대중 매체의 부정적 효과를 그대로 인정한 셈이 되어 버렸다. 특히 영화라는 매체에서 그랬다는 것은 어떤 비극적 사건이 생길 때마다 범인이 본 폭력적 영화나 다른 매체를 탓하며 문화를 무시하는 몰이해적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여 스스로를 부정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살해 도구가 석궁이었던 원작은 로빈 후드의 이미지와 어느 정도 유리되었다. 일단 석궁은 시기적으로 로빈 후드가 사용한 무기가 될 수 없었고 편리와 합리적인 사고 및 접근법을 지닌 케빈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로빈 후드와는 별개로 선택한 것이라는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살인 행각은 자기 과시적 명예욕으로 국한될 수 있었는데 - 어색하지만 어찌 됐든 결말에서 희망이라는 걸 로빈 후드 책에서 찾아볼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컴파운드 보우와 로빈 후드 해트로 악이 강림한 케빈에게 다시 로빈 후드란 주문서로 희망을 기대하는 것은 착각, 아주 큰 착각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작가 이청준은 소설 조율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의 변화가 없을 때 그 사실 자체와 사실에 대한 인식이 지나치게 격차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 착각의 증거라고. 영화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 작력과 형식미를 어필하고 싶었던 걸까? - 마지막 케빈의 대사와 모자간 포옹이 사실의 작은 변화라 일컬을 수 있다 할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것은 후설이 말한 음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국한된 관점으로 한정된 현상의 일시적인 가시성 말이다. 케빈은 바자로프처럼 모성을 포함한 바로 그 느낌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혐오한다. 그것은 자신이 생각한 어느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인간의 위선과 나약함이라고 보는 것이다 - 영화에서 세면대로 에바와 케빈이 다를 바 없음을 보여주는 것은 이런 점에선 의미 있는 묘사였다. 그러니 마지막에 회개처럼 보이는 케빈의 모르겠단 말은 이 태도를 거둬버린다기보다 한층 더 심화된 표현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옹은 일시적인 발로에 지나지 않을까? 이 행위와 유일하게 에바를 엄마로 의지한 시간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결국 케빈은 그때 로빈 후드를 읽고 사냥꾼이란 꿈을 꾼 것이 되어 버렸는데.
나는 모성이라는 점에서 바자로프의 어머니 아리나의 사랑만큼 절실히 와닿지 않았던 에바의 모성, 그 위선적인 사랑이 이 영화의 정서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일부만으로 전체 모습을 부정하고 희망을 가질 순 없는 것이다. 단지 참회라는 그녀의 선택은 왠지 에바에게서 다른 선택지를 소거한 채 제시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는 판단에서 나는 영화의 많은 것이 음울했고, 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이 소재와 주제의 조화와 형식과 의미의 상충을 보지 않고 단지 영화적으로 현란했다는 연출의 근거만으로도 영화가 좋다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굉장히 잔인한 취미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책이 정작 읽혀야 하는 사람에게 안 읽힌다는 것을 깨닫고는 책을 써서 무얼 하나란 걱정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 상원 의원, 장군들은 책을 - 더군다나 자신의 책은 더욱 -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케빈에 대하여가 이러한 아이러니 보다 더 큰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에바 같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읽고 보고 들음으로 에바 식의 불안은 확장되어 갈 거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더 나은 사회를 이루는데 긍정적 일조를 할진 나는 모르겠다. 소설은 2003년에 쓰였고, 조승희 사건은 2007년에 일어났다. 조승희 사건이 조기에 진압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건 현실 상태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인식 문제에 있었다. 첫 살인 사건이 새벽에 기숙사에서 조승희에 의해 일어나고 있었을 때 여자의 비명과 두 개의 나무가 부딪치는 것 같은 큰 소리가 들렸음에도 아무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음으로 별일 없을 거란 낙관적 불안을 내포한 채 무시되었고 그건 첫 희생자 에밀리 힐스처를 처음 발견한 몰리 도녀휴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그렇게나 생경한 정서의 큰 소리가 공동생활공간에서 정적을 깨면 듣지 않기가 오히려 더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결국 오판과 그날의 수업을 무리하게 진행시킨 결과를 낳았다. “걱정 마십시오 스티커 총장님. 모두 통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사고에 불과합니다.” 기숙사가 캠퍼스 내에 있었지만 그들은 에바처럼 인지부조화 상태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기숙사 내 사람들에게 잠재했던 것과 같은 불안 때문이라는 것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 불안한 확장시킬 거라는 게 내 의견이다. 출산은 피할 수 없었고, 아이는 내가 낳은 아이이니 아무 일도 없이 행복할 거란 믿음을 갈수록 고취시키는 그 불안 말이다. 이 과정의 역설은 영화의 역설로 우린 절대 케빈을 위한 케빈에 대해 얘기할 수 없음이다. 한 개인을 완벽한 이해의 범위로 들인다는 것은 모든 것을 통제하기 불가능하단 현대 인식의 현대 시대에 이르러선 언어도단일 뿐이다. 더군다나 이해라는 것은 이해의 당사자 또한 이해의 범위 안에 종속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심연을 들여다볼수록 심연 또한 나를 들여다보는 관계에선 무엇도 고정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변모하는 점에서 그 수많은 변화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인식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신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호적 관계가 성립할 수 없었던 신화시대이기에 가능했고, 그래서 단선화된 신을 인간 사회에서 종속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나 파악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위장하거나 표백할 수 있음으로 순수한 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어딘가에 내포하게 된다. 절대 제거될 수 없는 상태로서. 그러니 우리가 악에 대해 얘기하려면 악이 되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악이 된다는 것은 나름의 정의란 논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 것인가? 어쩌면 영화가 케빈에 대하여가 아닌 케빈을 대하며 에바에 관하여를 보여주는 것은 케빈에 대하여를 악이 되지 아니하면서 얘기할 수 있는 유일한 빗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것 또한 케빈에 대하여를 얘기하지 못했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 그럼 우린 케빈에 대해 어떻게 얘기할 수가 있을까? 케빈인 우리에 관해 어떻게 변해할 수 있을까? 여기서 논의된 두 매체로 구현된 한 작품은 이 마지막 질문들에 정답이 아닌 것을 남겼다. 우린 그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