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와 케이
어둠 속에 빛나는 눈은 악마의 산물.
어리석은 자와 마음을 닫아버린 자.
이것을 아름답고 즐거운 것으로 본다.
-動物脂- 피에르 드 보봐르
아름다운 사랑의 완성이란 결국 함께하지 못하기에 영원히 계속될 형태로 끝을 맺는다. 사랑은 함께할 수 없기에 영원히 계속된다. 어린 시절. 좁은 문을 읽으며 이해하지 못해 나는 알리사를 혐오했었다. 나이가 들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삶을 가지고 설국을 읽었기에 나는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지 못했다면 결코 요코를 이해하지 못해 모두가 읽고 발견한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랑은 나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애니메이션 인랑에서 후쿠와 케이의 이야기가 그렇다. 정치적 배경과 조직 사회에서 개인의 개성 말소란 세계관 속에 인간의 사랑이란 어떤 가치인지 가늠하게 하는 이 이야기는, 존 르 카레의 초기 스파이 소설 속 사랑처럼 인간 사회 속에서 인간일 수 없는 인간들의 사랑이기에 헛된 희망을 함의하고 비극으로 끝을 맺기에 그렇다. 인간으로서 삶을 포기했던 후쿠. 이야기의 결론에서 후쿠가 사랑으로 넘어설 수 있었던 장벽은 스스로가 세운 것임을 우린 알게 된다. 밀턴 마이어는 선택에서 궁극적인 요인은 상식이며, 압력을 받은 인간이 가장 빨리 잃어버리는 것 역시 상식이라 했다. 인랑이란 조직 존폐의 명분은 후쿠에겐 삶과 죽음의 선택지였고, 존재 유무를 강요받은 조직 속 인간은 강인한 폭력성을 실존의 근거로 인정받아야만 했다. 오랜 조직 생활로 비정함을 내재한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잠시 조직의 적이었던 케이의 모습으로 사랑을 꿈꾼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사랑이 후쿠에게 사랑을 할 수 없게 한다. 케이가 읊는 빨간 두건 동화는 후쿠의 무기력함을 체제의 보이지 않는 힘에 비롯된 것이라 보이게 하지만 실은 사랑이 후쿠를 무기력하게 한 것임을 오랜 시간 지나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랑의 강요가 상식을 배제하게 한 것임을. 오랜 시간. 지금은 사라진 종로의 한 영화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조악한 부분을 차치하고도 계속해 이 이야기를 바라보고 떠올린 것은 아픔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케이가 후쿠의 품에 안겨 엄마에게 묻는 그 질문들이 잔인하다고 생각한다. 후쿠와 케이, 그리고 나, 셋 모두에게. 그건 내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린 서로에게 악마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건 이 외로운 기록에 아름다움을 더 했던 것. 아마도 우리 모두가 반복해서 끊임없이 망각하게 되는 그것으로 우린 아주 많은 걸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사랑과 사랑할 수 있었던 모든 시간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나 자신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