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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영화 세 편

by 아라베스크


올해는 작년보다 상영 편 수가 줄어들었고, 국가 다양성도 좁아졌다. 이건 이번 영화제의 문제라기보다 오늘날 영화 산업의 문제로 보인다. 만들어지는 영화가, 영화제에 출품하여 팔려는 시도가 줄어든 것이다. OTT가 장악한 시대. 이제 영화는 체험이 아니다.


7편을 봤다. 그중 인상적인 세 편은 사가라 감독의 모래폭풍 속에서, 사카모토 유고 감독의 잠자는 바보, 브루노 포르자니와 엘렌 카테 공동 연출의 리플렉션이었다. 이 세 편뿐만 아니라 내가 본 영화들의 공통적 정서는 반복이었다. 일상과 비일상, 그리고 환상 속에서 인물들은 반복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다. 실패의 연속.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잠자는 바보는 일본 내에서 굉장히 호불호가 갈린 영화였다. 영화 진행이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에서 벗어난 듯 보이는 하찮은 일상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ダラダラ 뒹굴뒹굴 일상을 보내는 두 주인공으로 영화는 꿈이 없는 사람과 꿈이 있는 사람 사이에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찾지 못한 청춘을 조명한다.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과 꿈을 가진 사람, 그것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은 축복받은 삶이라고 말하는 영화지만 산업화된 사회에서 성공은 꾸었던 꿈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첨언하는 영화였다. 오늘날에는 수없이 반복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두 주연배우의 연기가 많은 걸 달리 보게 한다.


사가라 감독의 모래폭풍 속에서는 중국식 웨스턴 무비 느낌으로 경찰관 세 명이 지키는 마을에 악당들이 돈을 노리고 모여드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밀도가 높다고 표현할 수 있는 세밀한 연출과 사운드의 조화가 때로는 영화 속 법칙처럼 보일 때가 있어 관객은 쉽게 전개를 예측하게 된다. 주인공은 경찰이 되기 전에도, 되고 난 후에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기 운명을 통감한다. 다만 이전의 실패와 다른 것은 영화 결말에 이르러 목표와 목적, 성공보다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뿐이다.


리플렉션. 본 제목은 프랑스어고 영제로는 Reflection in a Dead Diamond로 John. D라는 스파이가 노년이 되어 해변가의 젊은 여성을 보는 것으로 과거를 반추하게 되는 이야기다. 감독들의 이전작처럼 현란하고 모호한 플롯으로 간단한 줄거리를 어렵게 만드는 형식을 취한다. 그라운드 하우스적 연출로 영화를 키치하게 만들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강력한 의도였음을 엔딩으로 알게 되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과거를 새롭게 기억하려는 인간의 기제를 형식으로 구현해 인생이라는 것을 조명한다. 주인공은 특별한 인물이고 그가 평생을 쫓았던 세르펜틱도 붙잡을 수 없는 사랑이자 환영, 그리고 숙적이었지만 그것조차 상실한 채 맞는 노년은 더이상 특별한 게 없다. 그 점에 나는 감동했다. 인생을 이야기라 한다면 인간은 이야기 도중에 죽을 수밖에 없다. 몇 가지의 성공과 실패를 자기 인생에 적을 수 있었더라도 결말은 항상 실패라는 점. 그래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어떤 모습이 살아간다는 건지, 어떻게 살아가야 살아간다는 게 되는 것인지. 리플렉션. 죽은 다이아몬드에 비친 내 모습이 무엇인지를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부천 영화제를 오래 다녔다. 십수 년. 나는 이제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인간의 삶을 초월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것 또한 반복일까? 지금에 이르러 나에게 반복이라는 건 반복이라는 형식 이상의 의미가 반복이라는 과정과 행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내 마음의 반향일까?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닐까 두려운 마음에. 이것은 역설도 잠언도 아니다. 오늘 나는 지금의 나를 반복으로 묘사할 뿐이다. 그렇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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