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by 솜)
가을 단풍이 어수선하다. 드라이아이스가 액체를 거치지 않고 기체가 되는 것처럼 초록색 이파리에 단풍이 제대로 물들지도 않았는데 낙엽이 되고 있다.
여름에는 초록초록한 나무를 보면 컴퓨터와 스마트폰 화면에 피로해진 눈이 저절로 시원해졌다.
가을 나무가 초록빛을 다 잃어버리면 내 눈은 어떻게 하나,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이 시리게 파란 하늘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내 눈은 가을에도 휴식을 취할 수 있겠구나.
요 며칠 파란 하늘과 친해졌는데 출근길에 거리로 나와 보니, 사방이 온통 회색빛으로 덮여 있었다. 가을도 봄처럼 변덕을 부리는구나. 스산한 가을 바람이 대로를 쓸고 있었다. 떨어져서 뒹굴던 가로수 잎이
바람을 따라 갈 길을 모르고 이리저리 헤매며 날아다녔다.
가을 바람이 시원하지도 않고 눅눅하기만 했다. 예전 같으면 금요일이면 아침부터 날아갈 듯 가벼웠던 마음이 웬일인지 뒤숭숭하기만 했다.날씨 탓인가? 아닌 것 같다. 이토록 심란한 마음이라니. 나는 이 가을에 무슨 일 때문에 안달이 났을까? 숨어 있는 욕구 불만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꿈에서도 걱정하던 한 가지 생각이 짚였다. 찾았다. 아마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한 영화 에세이 때문일 것이다. 이제부터 일주일에 한편 씩 정해진 요일에 올려야 한다. 작가님들의 연재북이 올라올 때마다 나도 뭔가 계획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주제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하던 거나 할까 하다가 덜커덕 영화 연재북을 만들었다.
전처럼 맘 내킬 때 한편 씩 자유롭게 올리면 될 것을, 나는 빼박 NP 맞구나. 일주일에 한편 씩 올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내가 고른 영화 제목을 보니 명작 위주로 치우쳐 있다. 어쩌자고 겁도 없이 저런 식으로 올렸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불쑥불쑥 걱정이 올라 오곤 했다. 브런치 연제 걱정이 숨어서 나를 누르고 있었구나, 이제 와서 어쩌겠나, 나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어깨에는 점심 도시락이 들어있는 백팩이 메여 있고, 손에는 솜이네 오피스텔에서 가져온 세탁물을 담은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건널목을 부지런히 건넜다. 마음은 황영조인데 걸음은 제자리걸음을 겨우 면하는 수준이다. 빨간불 되기 직전에 가까스로 건넜다. 슬라이딩 세이프잖아. 넨장, 아침부터 어째서 이렇게 피곤한 거지? 내가 벌써 이고 진 저 늙은이가 되었나?
솜이네 오피스텔에 도착해 보니 출근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쓰레기통이라도 비워줘야겠다, 방에 있는 쓰레기를 몽땅 들고 쓰레기 하치장으로 내려갔다. 혹시 분리가 안되고 섞인 것이 있나, 하고 쓰레기통의 쓰레기를 검사했다. 생수 병은 말할 것도 없고 플라스틱 백에는 플라스틱 용기가, 비닐 백에는 비닐만 소복소복, 종이 쓰레기백에는 종이만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분리수거도 성질대로 철저하게 했구만, 덕분에 각각의 분리수거 통에 주르륵 붓기만 하면 되었다. 우리 집 쓰레기도 버릴 때 미리미리 종류대로 철저히 분리해야 겠다. 속으로 다짐을 하는데, 나만 잘하면 뭐하나 남자들이 제멋대로 버릴 텐데, 하는 생각이 뒤따라왔다. 금방 했던 생각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결국 살던 대로 살게 되겠지.
바닥 청소는 청소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청소기를 청소하는 것도 귀찮을 까봐) 대신에 부직포로 밀면 된다. 밀대에 끼우려고 부직포를 찾으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유리창 청소용 젖은 부직포가 보이길래 꺼내서 밀대에 끼웠다. 유리창 닦기용 부직포면 어떠리, 어차피 닦아내는 것일 진대, 상관없다.
바닥 청소까지 했는데도 출근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아침에 너무 일찍 나왔나. 카페에 가기는 애매한 시간이라 망설이다가 오랜만에 사무실에 커피 셔틀이나 해야 겠다 하고 커피 집으로 갔다.
얼죽아(얼어죽어도 아이스아메리카노)직원용 아이스아메리카노 네 잔이랑, 봄여름가을겨울 뜨거운 아메리카노만 찾는 어르신 용(나?어르신 커피,예스) 뜨거운 헤이즐넛 두 잔을 샀다.
사무실에 와서 헤이즐넛 커피를 마셔보니 악,커피 맛이 왜 이래? 헤이즐넛 시늉만 낸 채, 설탕만 어슬프게 넣은 맛이다. 이를 어쩌나, 나는 그렇다치고 팀장 어르신은 어쩌지? 주고도 욕먹는 것 아닌가?
-커피가...망했어요, 00주임님 어째요? 팀장 님도 같은 것 드렸는데.
-요즘 주임님 감기 땜에 입맛이 떨어졌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 아닐까요?
-과연 그럴까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팀장님은 커피라면 무조건 좋아하니까 괜찮아요. 팀장님은 커피 맛을 가리지 않더라구요.
-오잉? (신입00주임아, 사회생활 오데서 배웠노? 벌써 노련미가 넘치는구나)
정말이지 우리 팀장 어르신은 하루에 커피를 최소 8잔을 마신다. 저 연세에 저렇게 마시고도 잠은 잘 주무시는지 걱정될 정도다. 그렇다 하더라도 커피가 맛없으면 부어버리면 그만이지 했다.
00주임의 내 입장을 견지한 커피 맛 해석 덕분에 금요일의 즐거운 기분으로 되돌아왔다. 업무용 컴퓨터에 로그인을 하고 이것저것 확인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한 회원님이 지나가다가 감기 좀 어떠냐고 물었다.
'솔'음을 장착하고 경쾌하게 대답했다.
-많이 나았어요.
-그렇게 아픈데도 하루도 안 쉬고 출근하시다니 대단하세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나오면 저만 손해잖아요.)
무슨 일이든 꿀렁꿀렁 넘겨버리는 ENFP 어르신은 맛없는 커피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운 하루를 보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