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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Feb 06. 2024

아무튼 정년

프롤로그

아무튼 정년

올해 정년을 맞았습니다. 근무 기간이라고 해보았자 고작 2~3년 남짓이지만 정년이라고 하는 것이 근무 기간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어서 정해진 나이에 도달하면 무조건 일을 놓고 나가야 하지요.

공식적으로는 당연퇴직이라고 한답니다. 아무튼 저는 올해 정년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주로 독후 활동을 돕는 일을 했지요. 그보다 한참 이전, 즉 결혼하기 전까지는 대기업 사원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을 (그것도 대기업에)하여 취준 중이거나 발령을 기다리는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첫 직장에서 남편을 만났더랬지요. 아주 별로인 만남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은 찜찜한 상태인 데다가 마음 깊은 곳에 아련하게 울리는 소리(이건 아니야, 제발 다시 생각해봐)가 계속해서 저의 마음에 부딪혔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그냥 결혼했습니다.



 제가 대기업에 다닐 때만 해도 여사원이 결혼을 하면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즉시 경단녀가 되었습니다.



외국인 회사를 잠시 다니기도 했지만 살림과 육아를 위해 집안에 눌러 앉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고 주부로서 평범하고 무난하게 살아 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남편은 내가 다니던 대기업에 그대로 다니고 있었고 연봉과 복지와 학자금 등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저로서는 미래에 대해 사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삶이 제 생각대로 흘러가 지지가 않았습니다. 남편은 어이없는 이유로 실직을 하게 되었고 저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0년 전인 그때에도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40대 초반 경단녀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독서지도사 논술지도사 등 독서에 관련된 자격증 몇 개를 취득한 후 관련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지요.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쓰는 일은 적성에 잘 맞았습니다. 유치원생 부터 고2까지 두루두루 만났지요. 아이들과 그림책 동화책 한국사 세계사 문학 비문학 종류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습니다. 



극한 직업까지는 아니지만 애환이 많은 직업이었지만 그보다 보람이 더 많았습니다. 힘듦을 덮을 만큼 충분히요. 책이며 학생이며 학부모까지 글감도 넘치던 시절이었지요.(그때도 요즘처럼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면) 하지만 그때는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이들 뒤치닥 거리와 넘치는 수업으로 시간적으로나 정신적으나 여유가 한 톨도 없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때 아이들과 함께 썼던 글마저도 남아 있지를 않네요. 뿐만아니라 수업을 위해 샀거나, 사야 했던 책들도 깡그리 버려지는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첫 이사 때는 한 트럭을 버렸어요. 형부의 트럭에 제 손으로 실어 준 후에 한참을 물끄러미 쳐다 봤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여러가지 이유로 10여 년을 줄기차게 해 오던 수업을 그만두었습니다. 수업은 그만두었지만 경제 활동을 쉴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직장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을 치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일자리들은 하나같이 매우 고달파 보였습니다.(특정 직업을 폄하하는 것 아님)



시험을 치르자, 이왕이면 공공기관으로 가자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늘그막에 취준생이 되었습니다.

여타 기업체도 마찬가지겠지만 공공기관에 지원하려면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이 필수이지요. 코로나로 인해 학원은 죄다 문을 닫았고 이미 50대 후반에 진입하고 있었지만 독학으로라도 자격증은 취득해야 했습니다. 이론은 기출 문제집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되었지만 실기 시험은 기출 문제집으로 도무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유투브 강의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반복해서 떨어지고 난 후에야 겨우 최신 업댓된 인강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한 해 동안에 컴활 2급과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그 대가를 톡톡히 지불해야 했습니다. 컴활 실기 연습을 하느라 시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말았지요.(돋보기를 안 쓰면 스마트폰 글씨도 못 읽음)



꽤 규모가 큰 공공기관에 응시했습니다. 엄청난 경쟁력이었지요. 저는 예비 3번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떨어졌지만 완전히 떨어졌다고 보기는 애매한 상태였지요. 6개월 안에 제 앞에 3명이 그만둔다면 저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언감생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지요. 기약 없는 결과를 뒤로 하고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경기도의 한 특성화 고등학교에 직업상담사로 3월~12월, 10개월 계약으로 근무를 시작했지요.



비록 계약직이었지만 일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경력이 쌓일 수록 발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분명 부가가치가 있는 일이었지요. 이전에 하던 일과도 맥락이 비슷했기에 적응하고 말고 할게 없었지요. 진로지도 선생님으로서 맨 처음 한 일은 학생들의 취업을 위한 자소서를 봐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지원하는 기업에 대해 정보를 모으고 그들이 원하는 인재상에 맞추어 자소서의 방향을 맞추었습니다. 혹자는 자소설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다가 5월이 되었습니다. 저의 예비 번호는 1 달만 있으면 효력을 상실할 터였지요. 사실 저는 직업상담사로 취업이 되어 첫 출근을 하는 날 희망 고문의 상징이었던 예비 번호를 멀리 멀리 떠나보냈던 참이었지요. 

그런데 5월 어느 날 느닷없이 그곳에서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담당자는 바로 출근이 가능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앞뒤 가리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습니다.(of course, why not?) 제 안에서 정규직에 대한 로망의 위력이 감소되지 않고 도도한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던 것이지요. 왜 안 그렇겠습니까? 정규직이 되면 그 징글 끔찍 지겨운 자소서니 면접이니 계약이니가 필요 없을 테니까요.



제가 근무하는 곳은 규모가 꽤 큰 공공 기관의 부속 센터입니다. 행정복지 센터처럼 공공서비스의 최일선에서 일하는 곳이지요. 2 교대 근무 형태이고 저는 저녁 근무 담당입니다. 오후 1시 출근해서 저녁 10시에 퇴근하고 있지요.


 

방구 질 나자 보리 양식 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근무시간도 그렇고 이제 모든 게 적응되어 익숙해졌는데 덜커덕 정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상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보내는 생활을 하다 보니 일과 일상은 거의 연결되어 있지요. 

정년 퇴직을 하기 전에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일상에 대해 써 보기로 했습니다.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닌, 씁쓸한 일상 속에 감추어진 소소한 진실의 조각들, 살짝 들추면 누구에게나 한 번 쯤 있을 법한 일들을 말이죠. 정년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제목은 아무튼 정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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