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저렇게 많았단 말인가 할 때가 딱 한번 있긴 했다. 딸이 5살인가 6살인가 무렵이었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우리 집 쪽을 보며 나를 불렀다.
처음에 엄마 하고 부르던 딸은 내 대답이 없자 곧바로 OO집사님하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나는 나가려고 현관 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아이의 다음 행동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 자리에 다시 섰다.
딸은 곧 ooo아줌마라고 부르더니, 그 다음엔 자기 이름을 넣어서 oo엄마 라고 하더니 그래도 안되니까 아들 이름을 붙여서 oo엄마라고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가 잠깐 숨을 고르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oo선생님 해 놓고는 곧바로 회사 이름을 넣어서 ***ooo선생님했다. 이름 부르기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쉬임 없이 읊어 대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읊을 정도로 정확하게 꿰고 있구나 했다.
이 직장에서도 그에 못지 않게 현재 진행형으로다가 다양한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나의 공식 직함은 주임이다.
첫날부터 직원들은 대개 그렇듯이 직함에다 님자를 붙여서 불렀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분이 한 분 계셨으니 그 분(상사 아님)은 나를 꼭 여사님이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 고쳐지겠지 했는데 3개월의 수습기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그렇게 불렀다. 여사님이라니, 한번 거슬리기 시작하니 계속 신경이 쓰였다. 왜 저러지? 내가 어려워서 그런가?
어느 날 내게 할 말을 마친 그 분을 작정하고 불러 세웠다.
-00님 왜 저를 여사님이라고 부르세요?
-그럼 뭐라고 불러요?
-저의 공식 직함이 있잖아요?
그분은 대답도 하지 않고 언짢은 기색을 온 몸으로 발산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냥 편하게 부르게 놔둘걸 그랬나? 낫살이나 먹어 가지고.'하는 마음이 불현듯 스쳤지만
일어서는 그 분에게 한마디를 기어코 해 주었다.
"oo님, 여사님이든 아줌마든 그냥 oo님 편한 대로 부르셔요." (고구마씨, 걍 니맘대로 부르세요)했다.
문화 센터는 남녀노소, 거주지, 성별, 연령 제한이 없이 누구나 이용 가능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만큼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호칭 배틀을 하는 사람들처럼 별의별 호칭을 다 끌어와서 붙인다. 왕왕 과한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혼자 야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프로그램을 알아보기 위해 처음 방문을 했거나 사전 답사를 위해 온 사람들은 호칭을 부르지 않고 용무를 보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 보고 간다. 호칭을 붙여서 부르는 사람들은 월 혹은 년 단위로 등록을 하고 강좌를 수강하는 회원, 다시 말해 자주 만나는 회원들이다. 인사도 나누고, 오며 가며 궁금한 사항들을 확인하기 위해서 데스크로 와서 나에게 말을 건다.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선생님이다. 특히 여성 회원들이 나를 그렇게 부른다. 여성 회원의 상당수는 어르신들인데 그 분들도 스스럼없이 그렇게 부르며 문의도 하고 결재도 하고 입장권 등도 발급 받는다. 듣는 나도 거부감이 없기에 서로가 편하게 사용하고 있다.
선생님 다음으로 많이 듣는 호칭은 여사님이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간혹 아줌마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주로 나이 드신 남자 어르신이 그렇게 부르곤 한다. 아줌마 여기 00 1인분 추가요, 할 때와 비슷한 톤이다. 아줌마라는 말은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분 나쁠 것도 없다. 나는 아줌마니까.
어떤 분은 내가 팀장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꼭 팀장님이라고 부른다. 팀장님과 비슷함 어감으로 실장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부동산 사장님이 그렇게 부른다. 실장을 거느린 부동산 사무실인가 보다.
지금은 이사 가셔서 더 이상 오시지 않는데 그분은 나를 사무장님이라고 불렀다. 남편이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지 어않을까 하고 짐작한다. 어느 날 그 분과 같이 오신 분이 아니 왜 선생님을 사무장이라고 부르냐고 핀잔을 놓는 말을 했지만 그분은 이사갈 때 까지 나를 사무장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사무를 보는 사람이니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내 친구 집사님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집사님은 어느 모로 보나 동장 포스야. 그런데 동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나 봐?" 했다." 주민 센터에 다니는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무슨 동장이 거기서 나와요? "하고 웃었다.
같은 교회 다니는 분들은 당연히 나를 집사님이라 부른다. 합당한 이름이다. 그런데 다른 교회 다니는 분은 나를 권사님이라고 부른다. 젊은 분들은 나를 부를 때 저기요 한다. 나는 이모님이라고 안 부르는 게 어디야 하면서 냉큼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해 준다.
돌발 퀴즈입니다. 제가 듣기에 가장 황당한 호칭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바로바로'언니'입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78세)인데 해맑은 표정으로 언니라고 하셔서 처음에는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인사성이 얼마나 밝은지 강좌를 마치고 나갈 때마다 꼬박꼬박 "수고하세요, 언니" 한다. 처음에는 당황이 되기도 해서"아~네!" 했지만 요즘에는 나도 넉살이 늘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눈다.
사실 언니 라는 호칭은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내가 시어머니가 운영하는 청과물 가게에서 일할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주 듣던 호칭이긴 하다.
"언니, 사과 한 박스 얼마에요? 언니 좀 깎아주면 안 되요? " 그러면 옆에 있던 시어머니는 "여는 (부산)식당에서는 이모고 시장에서는 사장님 아니면 언니다, 니는 사장이 아닝께 언니다." 했다.
사람들은 제각각 나에게 다양한 호칭으로 부르지만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을 한 가지 호칭으로 통일해서 부른다. 저는 그들을 어떤 호칭으로 부를까요? 이것도 알아맞혀 보세요. 어르신? 아니죠. 회원님? 노노, 여사님,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틀렸습니다. 정답은 선생님입니다. 남녀노소 차별 없이 몽땅 선생님이라고 부르지요.
어떤 분은 자기가 선생이 아닌데 왜 선생이라 부르냐고 한다. 그러면 저는 어르신이라 부르는 것보다 선생님이 더 무난해 보여서 그러는 것이니 양해해 달라고 한다.
오후 늦은 시간에는 수업을 마친 중학생들이 종종 오기도 한다. (고등학생들은 학원 가느라 안 옴)
중학생인데도 나는 "선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가 자동 발사된다.
그 학생은 내가 언니라는 말을 듣고 황당해 한 것보다 더 황당해 한다. 할머니뻘 되는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했으니 황당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아차, 하며 이어지는 말에서는 좀 더 현실 언어를 사용해 준다.
"학생아 결재는 뭘로 할래? 현금이니? 카드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내가 누구냐로 불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이기를 바라는가? 혹은 내가 어떤 존재냐에 따라 내가 달려가는 방향이 결정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