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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소금 Feb 20. 2024

늙음 비용


특성화 고등학교 직업상담사를 그만 둔 다음 날, 본사에 가서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기뻤고 좀 들떠 있었습니다. 비록 예비 번호로 들어왔지만 늦은 나이에 공채로 입사한 정직원이었으니까요. 본사에서 상임 이사님이 "이번 공채에 1000명이 지원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했습니다.



인사와 몇 가지 덕담을 들은 후, 지문 등록, 카드 발급, 계좌 개설 등 직원 등록을 마친 후 근무지로 갔습니다. 근무지가 있는 곳은 저의 손바닥 안에 꿰고 있을 정도로 잘 아는 동네였습니다. 이사 가기 전에 죽 살았었기 때문이지요. 익숙한 동네였지만 사무실을 앞에 두고는 살짝 긴장이 되었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사무실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관장님과 직원 서너 명이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본부로부터 소식을 듣고 내심 나를 기다린 눈치였습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갑자기 사무실 분위기가 급 썰렁해지는 느낌이 들었지요.



예상치 못한 상황이 퍼뜩 해석이 되지 않았지요. 어색한 침묵을 깨고 관장님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이가 몇 살이유?" 대뜸 물었으나 관장님이 질문했으니 대답을 해야 했습니다. "저 00살 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늙어서 죄송합니다." 했지요.

'첫 인사가 좀 얄궂네.  내 나이를 묻는 거지?  전의 분위기와는 정반대인 걸? 뭐가 잘못된 걸까?조직 생활이 원래 이런 건데 나만 모르는 건가?'



싸한 분위기와 리더의 첫 질문에 대한 의문은 퇴근 후 집에 돌아 가서야 겨우 풀렸습니다. 첫 출근의 소회을 나누자 아이들이 말했습니다.

"음, 엄마가 너무 늙어서 직원들이 황당했나본데?" 



주변에 지인들을 보면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습니다. 나이가 들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지요. 그러나 그런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평가가 사무실에서는 통할 리가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줌마에 불과했습니다. 서류와 필기시험 면접을 거쳐서 입사하면 다 같은 직원이라 생각했으니까요.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만 보고 있었던 것이죠.



사무실 업무보다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한 일이 더 시급해 보였습니다. 나보다 먼저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딸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딸의 충고는 가차 없었지만 현실적이었습니다.



"엄마는 먼저 그 사람들이 엄마보다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딱 봐도 직원들이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거든.

그렇지만 몇 가지만 잘 지키면 큰 어려움은 없을 거야.


먼저 직원들이 아들 딸 나이라고  말꼬리를 내리지 말아야 해. 존대말 고수해주고.

너무 큰소리로 말하는것도 별로라는걸 알아둬.


젊은 사람들은 묻는 걸 싫어해.

그 직종에서만 통하는 고유업무 외에는 개인적인 것이든 업무적인 것이든 아예 물어볼 생각을 말어."

"스프레드 시트 막히면 어째?"

"구글에 물어봐, 사람들의 궁금증에 대답해 주려고 언제나 대기하고 있잖아.


직원들한테 딴지 걸지 말고 훈수 두지 말고,

실적 낼 일 없으니 파이팅 넘치게 일 안 해도 되니까 시키는 대로 만 해도 중간은 갈거임.


사수가 일을 가르쳐 줄 때 메모 꼭 하고.


어쨌든 사무실에서 엄마가 최고령이잖아?

늙음 비용, 에이징 코스트를 좀 지불해야 할거야,

별건 아니고 커피 셔틀 자주하고, 커피는 얼죽아(얼어 죽어도 아메리카노)로, 알지?"



딸은 가끔 사무실 근처로 찾아와 잘하고 있다고 격려도 해주고 속상한 일을 털어 놓으면 속상하게 한 사람에 대해 폭퐁 비난도 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무실에 커피 돌리라며 쿠폰을 쏴 주었고 감정적으로 치우쳤다고 생각될 때는 객관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려 주어 정신이 번쩍 들게도 해 주었지요.

그동안 속상한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배운 것이 훨씬 많습니다.



아들과 딸의 조언에다가  K-아줌마의 뚝심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접어주고, 토 달지 않고 시키는 대로 "예예" 하며 나름대로 존재 이유와 사명감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틈틈이 브런치에 글을 쓴 것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을 씀으로써 부정적인 감정에 에너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요

브런치 글쓰기에 대해서는 직원들의 무관심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직원들은 내가 무엇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거든요. 가끔 브런치 창을 켜 두어도 거들떠 보지도 않을 뿐더러 뭐냐고 묻지도 않지요. 나이든 사람이 가끔 혹은 자주 저지르는 오지랖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답니다.  그야말로 쏘쿨(so cool)이지요. 


하루 종일 입을 닫고 있으면 답답하지는 않을까 했지만 그것도 실없는 기우에 불과했지요. 그곳을 이용하는 회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저의 외향적인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할 수 있었으니까요.



'내가 못 올 데를 온 게 아닐까? 난 왜 이 나이에 멋모르고 이런 데를 와서 이러고 사는 걸까?' 하고 종종 자책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감사한 마음만 한가득이랍니다. 배움과 깨달음은 나이 들수록 더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할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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