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3시에 출근해서 22시에 퇴근합니다. 저녁반을 맡았기 때문이지요. 오전반은 6시에 출근해서 15시 퇴근입니다. 원래는 직원 3명이 오전반 오후반을 번갈아 가면서 해야 하지만 저는 올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저녁반 고정을 자청했습니다. 저녁반 근무자는 저녁에는 주로 수영장에서 근무합니다. 수영장 강좌가 끝나는 9시30분까지 수영장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지요.
수영장 근무자인 저는 수영을 할 줄 모릅니다. 제 눈앞에 있는 수영장도 그림의 떡이지요. 사람들이 수영하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할 뿐입니다.
제가 자란 시골은 강을 끼고 있어서 여름방학이 되면 점심 나절에는 강에 가서 멱을 감았습니다. 소를 먹이러 가기 전 1~2시간 정도 멱을 감았는데 아이들은 주로 개구리 헤엄을 치고 놀았습니다. 아이들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지간하면 배영이나 개구리 헤엄 정도는 칠 수 있었지요. 저만 빼고요. 허구헌날 강에서 멱 감고 놀았는데 수영을 못할 수가 있나? 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수영을 하지 못했지만 놀림을 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수영을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다같이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지요. 멱을 감고 나와서 여름 땡볕에 뜨겁게 달궈진 자갈 돌로 귀에 들어간 물을 나오게 하려고 이쪽 저쪽 번갈아 갖다 대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그 이후에도 수영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귓병으로 자주 고생을 하던 터라 귀에 물이 들어갈까 봐 수영을 배울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이렇게 수영장에 근무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억지로 배울 수도 있었겠지만, 십 수년 후의 일을 어찌 내다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괜히 해보는 소리지요.
낮에 일하는 것과 밤에 일하는 것은 천지 차이 입니다.
오후 6시 이후에는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하지요. 퇴근 시간까지 남은 4시간을 소리 없이 끙끙 앓아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저녁 시간을 버텨 내려면 운동을 해야 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근력 운동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근력 운동이라면 헬스가 먼저 떠오르지요. 오전에 헬스를 하고 출근을 하면 되겠구나, 하고 근처 헬스장에 등록을 했지요. 쫄쫄이 바지도 사고 쫄쫄이 바지 위에 입는 반바지도 물론 샀지요. 헬스 용 운동화도 구비하고 운동복 가방까지 장만했습니다. 헬스장을 등록하는 순간 마음은 저만치 이미 몸짱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마음 한 구석에 이거이거 아닌데, 하던 부정적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1달 끊고 몇 번 갔게요? 네, 딱 1번 갔습니다. 쫄쫄이가 주인 잘 못 만나서 서랍에 쳐박힌 신세를 아직도 면치 못하고 있답니다.
헬스를 포기했지만 운동마저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걷기 운동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식사를 하고 사무실 뒤에 있는 공원에 가 보았습니다. 공원에 올라가니 공원 끄트머리에 생각지도 못한 등산로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레카를 외치며 등산로를 따라 걸었지요. 산을 오르내리는 코스를 돌고 내려오니 35분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식후 등산이 루틴이 되었습니다. 식사 20분, 등산 35분이요. 큰 비가 내리거나 큰 눈이 내리는 날이 아니면 무조건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운동이 가을 겨울 봄 여름을 지나 다시 가을이 가고 두 번째 겨울을 맞았습니다.
비록 짧은 코스지만 산책은 삶에 커다란 활력을 주었습니다. 요즘에는 10시까지 일을 해도 피곤한 줄 모르니 몸이 건강해졌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자연의 선물은 덤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각자의 독특한 개성으로 매력을 발산하며 눈과 귀와 마음을 씻어 주었습니다.
지금은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내어 줄 시간입니다. 하지만 겨울산의 멋짐은 여전합니다.
겨울산은 그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입니다. 추운 겨울에도 굴하지 않고 꼿꼿이 서 있는 나무의 생명력과 그것을 떠 받치는 여백의 미가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지요.
언제나 그 자리에 꿋꿋하게 서있는 나무는 사나운 추위와 같은 고난 속에서 모든 것을 비우고 맨몸으로 끝까지 견디는 생명의 품격을 배우게 합니다.
뭐니뭐니해도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은 여백을 담당한 하늘과 구름입니다.
파란 하늘을 운동장 삼아 내달리는 구름은 화폭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줍니다. 하늘과 구름은 인생에서 변해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를 생각하게 하지요.
군데군데 자리 잡은 바위와 지난 가을에 떨어진 낙엽마저 동양화의 운치를 더해 줍니다.
밝고 부드러운 햇볕, 거침없이 나무 사이를 휘감는 바람은 미로를 헤매던 스트레스를 잠재우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움츠리고 있던 상상력을 불러 내어 함께 뛰놀자고 재촉합니다.
높고 낮은 나뭇가지를 포롱포롱 옮겨다니며 지저귀는 새소리는 여유와 편안함에 쾌활함과 명랑함을
불어 넣습니다. 겨울산이 명랑하고 쾌활한 건 순전히 작은 새 덕분입니다. 까마귀와 청설모는 또 어떻구요?
겨울산이 그리는 동양화에는 무엇 하나 조화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모노톤의 세련미는 가을도 꼬리를 내릴 정도이지요.
저는 한 폭의 동양화 속에서 심신의 여유와 평온을 채우고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부드럽고 폭신한 황토길을 따라 내려와 공원을 지나 세상의 한 가운데 사무실에 사뿐히 내려 앉지요.
자연이 주는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온 저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잠시나마 제 눈 속에는 하늘과 구름의 맑은 색이 섞이고 둔탁한 목소리에도 어느 새 새소리가 섞여 들어 있을 지도요
산세권(?)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덕에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고 더불어 정년이 다하는 그날 까지 계속되기를바라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