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후 근무자이고 오후 근무자의 퇴근 시간은 저녁 10시이다. 오후 6시 자유 수영과 저녁 7시,8시 수영 강습을 위해 오후 근무자는 수영장에서 근무해야 한다. 9시 30분에 회원들이 수영장에서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수영장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저녁 시간은 일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낮 시간과 비교도 안되는 피로감이 몰려온다.
입사하고 나서 교대 근무를 처음 시작하여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몸땡이가 국으로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체력 관리를 하지 않으면 버텨낼 재간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 전에 아침 일찍 운동을 해 볼까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걷기 밖에 없었다. 식사 시간을 떼내어 걷기 운동을 시작했다. 마침 사무실 뒤에 등산로가 있어서 마음 먹은 즉시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15분 동안 식사를 하고 40분을 걸었다.
덕분에 처음에 약 먹은 닭처럼 비실비실 했던 것이 요즘은 퇴근 시간까지 꼿꼿하게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이는 고작 40분 운동 덕분이라니 말도 안된다며 바이오리듬이 저녁 근무에 리셋된 것이라 했지만 이것저것 합력해서 선을 이뤘겠지 한다.
저녁 근무는 피로감의 강도가 더한 것 말고는 불편함이 없다.
출근 시간이 그만큼 늦춰졌기 때문에 아침 시간에 집안일을 대충이라도 할 수 있다. 식구들이 하루 동안 먹을 음식과 도시락 반찬을 만들 시간이 충분하다. 청소는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데 요즘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일찍부터 음식이다, 청소다 집안일을 제대로 하고 나면 몸이 너무 힘들었다. 몇 번 몸살을 하고 나서 의욕대로 몸을 움직이다가는 뒷감당이 안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의욕이 넘쳐도 몸을 아껴야 한다.
장점이라고 해도 좋을 매력은 오전 근무자들이 4시에, 관장님이 6시에 퇴근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일할 수 있다. 6시 '땡' 하기가 무섭게 유사 시맘들이 몽땅 사라지면 할렐루야, 홀가분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하던 일 하면서 시간 되면 마무리하고 퇴근하면 된다.
회원들이 모두 퇴장하고 시설팀에서 센터 내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은 속히 퇴관해 달라는 안내 방송을 하면, 나도 하던 일을 끝내고 마지막 점검에 나선다.
매출 현황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익일 날짜에 맞추어 주차권에 스탬프도 찍는다. 키오스크와 공기청정기를 비롯하여 사무실 내의 끌 수 있는 모든 전자기기를 끈다. 남 여 탈의실에도 들어가 전자키가 잘 꽂혀 있는지 확인하고 여사님들이 일차로 점검한 시설들을 두루두루 재차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와 신발을 갈아 신고 겉옷을 걸치고 도시락 가방을 들고 3층으로 올라간다.
사무실로 올라가는 이유는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퇴근 지문을 찍는 것이다. 사무실 앞 벤치에 앉아서 지문 인식기에 22:00 시그널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직원의 근태는 지문 인식으로 관리하기 때문에 꼭 22:00 이후에 찍어야 한다. 21:59에 찍어도 안된다. 출근 지문도 마찬가지다. 12시 출근인데 12시1초에 찍으면 바로 지각 처리된다. 관장님도 소명 할 수 없다. 우스개 소리로 급한 일이 있어서 10분 전인 21시 50분에 가야 한다면 엄지손가락을 잘라서 동료 직원에게 맡기고 가야 될 것이라고들 한다.
10시가 가까워지면 지문 인식기 앞에 나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모인다. 남녀 미화분들, 시설팀 직원들, 헬스 직원과 수영 강습 선생님들, 수영 안전 가드가 그들이다. 모두 한마음으로 22:00 시그널이 뜨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시그널이 들어오면 대충 줄을 서서 입사시에 인식 시켜 둔 손가락을 갖다 댄다. 그렇다고 순식간에 지문 찍은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미화님들과 나의 경우는 한 번에 통과될 때가 드물다. 오랜 기간 사용으로 손가락 지문이 희미해져서 그렇다. 찍기 전에 호호 불어서 손가락 온도를 높이고 적당한 습기를 주면 그나마 잘 찍힌다. 어떤 미화님들은 소독액을 묻히면 잘 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한다.
퇴근 지문을 찍고 나면 그전까지 물에 젖은 솜 뭉치 마냥 무겁던 몸이 급 가벼워져서 닫혔던 입이 열린다. 1층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허물없이 스몰토크를 나누기도 한다.
오늘은 겨우겨우 버텼다니까요. 월요병은 고질병인가 봐요. 월요일마다 몸이 어찌 아는지 몰겠어요. 몸에 따로 뇌가 있나 봐요(월요일) 내일만 버티면 돼요.(목요일) 이번 주도 슈웅 지나갔네요. 심신이 너덜너덜해요. 내일 하루 더 나와서 일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아요.(금요일) 우리가 요일마다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신기하게도 똑같다. 희한하게도 예외 없이 월요일은 월요일의 몸이 되고 금요일은 금요일의 몸 상태가 되어서 그렇다고 내맘대로 생각한다.
가끔은 수영 강습 진도나 특정 회원이 잘 따라가고 있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그분 잘 따라가고 있나요?" "전혀 못 따라가고 있어요." "그래도 물에 뜨긴 뜨는 거죠?" "뜬다고 해야 되나? 잘 모르겠네요. 당최 못 알아 듣는다니까요." "샘이 하는 말을 알아 듣는다 쳐도 몸이 말을 안 듣는 건 아닐까요? 나이가 들면 몸과 마음이 따로 놀잖아요.(내 이야기) 다들 뭐 마음은 박태환이지 않을까요?" 샘들은 힘들다고 하는데 나 혼자 계속 빵빵 터진다.
남녀 미화분들은 대부분 동네 분들이어서 걸어 간다. 시설팀 기사님은 자전거를 타고 가신다. 남자 미화 아저씨 한 분은 나와 같은 방향이라 같은 버스를 탄다. 아저씨의 수다가 아줌마 수준이라 때로는 부담스럽지만 근방에 있는 딸의 오피스텔에 들를 때가 많아서 같이 가는 날이 많지 않아 다행이라고나 할까.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벤치에 멍하니 앉아 달 구경을 한다.
구름이 있는 날에 보면 달이 너무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구름에 달 가듯이'라고 하더니 달이 저렇게 빨리 자나가는구나 했는데 자세히 보니 달은 그 자리에 있는데 구름이 빨리 지나가는 거였다. 달이 없는 날은 맞은 편에 가지치기를 한 가로수와 가로수 너머 아련하게 보이는 먼 산을 바라본다. 달멍 산멍이 따로 없다.
집 앞에 내려서 풀0마켓(24시간 무인 마켓에서)에 들어가 콩나물과 (순)두부, 달걀을 집어 든다. 퇴근하기 전에는 집에 빨리 가서 눕고 싶은 마음 뿐이었는데 집에 도착하자 마자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 빨래들 돌리고 영화를 보면 몸과 마음이 각성이 되어 밤을 꼬박 새워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의욕대로 움직이다가는 몸 져 눕는다. 영화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을 위해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