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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봄날-20화

by 분홍소금

갑작스러운 추첨제 도입에 기존 회원들의 반발이 심했다. 다른 수영장들은 추첨을 하지 않는데 왜 이 수영장만 추첨을 하느냐, 추첨을 한다면 기존 회원에게 우선권을 주어야 하는데 신규 신청자들과 같은 자격이라니 말이 안 된다는 항의가 빗발쳤고 그것도 모자라 상위기관에 민원을 넣기도 했다.


추첨 전부터 시작된 민원이 추첨이 끝나고 나자 극에 달했다.

추첨이라는 것이 본디 붙은 사람이 있으면 떨어진 사람도 있는 법인데 일부 낙첨자들은 쉽게 승복하지 않았다.


추첨 결과가 발표 나는 날 기존 회원이었던 A 씨는 추첨이 떨어진 걸 알고 데스크로 급히 왔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이럴 수가 없다고, 이젠 어떡하냐고 하소연을 했다. 그녀의 대기번호는 6번이었다. 대기 번호가 여섯 번째라면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니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간신히 달랬다. 그런데 A 씨가 돌아간 뒤 얼마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의 남편이었다. 아내가 아쿠아로빅 당첨에 떨어져서 몸져누웠다고 했다. 인생의 낙이 없어졌다고 드러누워있는 아내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방법을 찾아달라고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어떤 분은 언제 들어갈 수 있는지 정확한 달을 대라고 했다.

매월 재등록 기간에 결제하지 않은 회원의 자리, 곧 빈잔리에 대기자 순서대로 들어가니까 너무 낙심하지 말고 기다려 주십사고 정중히 부탁을 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래서 언제 올라가나요?"의 반복이었다.


오여사가 목이 아프게 응대한 보람도 없이 추첨이 부당하다는 민원이 이어졌다.

아쿠아로빅을 등록해서 마음먹고 운동하려고 했는데 추첨이 웬 말이냐,부터 시작해서 왜 이곳에만 지역주민 우선권이 없느냐, 기존회원을 신규회원과 동급으로 대하면 어떡하느냐며 추첨제가 불합리하는 내용이었다.


오여사가 출근해 지문을 찍고 인사를 하자 관장이 오여사를 불렀다. 모니터에 펼쳐놓은 민원 메일을 보여주며 수영장 내부 사정은 오주임이 훨씬 잘 알고 있을 테니 답변서를 작성해 주면 어떻겠냐고 했다. 관장은 지난 답변서를 찾아서 읽어 보고 참고를 하되 너무 틀에 박힌 답변서보다는 민원인에게 닿을 수 있게 우리의 진심이 담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오여사는 지나간 민원에 대한 답변서울 찾아보았다. 센터의 정책에 보내주신 관심에 대한 감사로 시작해 제도를 시행한 취지를 설명한 후, 다수의 편의를 위한 결정이었으니 양해를 부탁한다며 앞으로도 부족한 점이 있으면 두루 보완하겠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공공기관에서 담당자가 쓸 수 있는 범위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여기에 무엇을 더 어쩌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한편으로 어떤 민원에도 다 통할 것 같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답변인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관장이 진심을 담아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여사는 먼저 눈에 거슬리는 사무적인 표현을 부드럽게 바꿔보기로 했다. 원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순서를 바꾸고 감성에 호소하는 글을 추가했다. 속상한 낙첨자들의 심정에 먼저 공감한 후 추첨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추첨제를 보완하기 위해 대기자제도를 둔 점도 친절하게 안내했다. 마지막은 여느 답변서처럼 미진한 부분은 차차 개선해 나가겠다고 썼다.


오여사의 답변서 메일을 받은 관장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제가 답답해하던 부분을 콕콕 집어서 보충하셨네요" 라며 오여사의 민원답변서를 겉바속촉 답변이라고 추켜올렸다. 겉보기엔 바싹바싹 똑 부러지는데 읽을수록 촉촉한 공감과 배려가 넘친다는 것이었다.


관장은 민원 답변서를 오여사가 쓰는 바람에 자신은 다른 업무에 쓸 시간을 벌 수 있고 오주임은 숨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며 그런 것을 두고 윈윈이라고 하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민원 답변서는 오여사의 차지가 되었다. 이 일로 관장과 오여사는 자연스럽게 업무에 대해 상의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두 사람은 함께 커피를 마셨고 날씨가 화창한 날은 커피를 들고 사무실 뒤편에 있는 공원에 나가 산책도 했다.


그렇다고 업무 시간에 짬을 내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업무시간 외로 한정되었는데 오여사의 출근시간이 남달리 일렀기에 가능했다.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근무하는 오여사는, 늘 12시 30분쯤에 출근 지문을 찍었다. 첫 출근부터 일찍 다니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항상 미리 도착했다.


관장과 오여사가 전에 없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직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것 자체가 힘이 주어지는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권세의 흐름에 민감한 방수지와 수영기능팀원들이 오여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전의 가시 돋친 말투는 몰라보게 부드러워졌고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며 살피던 일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사무실 분위기가 오여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지만 첫 출근 후로 굳어진 주눅 든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자신을 괴롭혔든 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는 마치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 옆에 앉은 것 같은 불편한 마음이 여전했다.


관장은 수영장에 자주 내려와 강좌 진행 상황을 점검했다. 데스크에서 오여사가 회원들을 응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관장이 한마디 했다. "어떤 까다로운 질문도 결국 즐거운 대화로 마무리하시네요."

관장의 지나가는 한마디에 오여사는 자신의 '쓸모'와 '존재 이유'를 확인받은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녀는 여태까지 자신이 사무실에서 제일 자신 있고 잘하는 일이었지만 그녀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라고 자조했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 맞지?" 대답은 '그렇다'였다. 오랜만에 확고한 대답을 낚아챈 그녀는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라고"

오여사는 그제야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기분 좋게 중얼거렸다. "드디어 내 인생의 봄날인가."





부족한 연재글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신 작가님, 독자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올 가을에도 수확의 바구니가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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